생생후기
인도네시아, 무지에서 사랑으로
KEMUDO PROJECT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Aku Cinta Indonesia! (I Love Indonesia!)
사실 아프리카를 갈 생각으로 워크캠프를 신청했다가 마지막에 급히 행선지를 바꾸었다. 선택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고, 그 중 하나가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사전 지식이 거의 없었다. 국교가 무슬림이라는 것도 이번 활동을 위해 사전 조사를 하던 중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무슬림이라면 중동 사람들만 믿는 종교라고 생각했었다. 홍콩에서 인도네시아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까무잡잡한 피부의 동남아사람들이 히잡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를 느꼈다. 그리고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9살 난 인도네시아 여자아이와의 대화와 함께 내 몸은 점점 더 인도네시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카르타에 내리자마자 더운 공기가 온몸에 착착 달라붙었다. 한국의 추운 겨울이 싫었다. 그래서 더더욱 하루 빨리 여름의 나라로 떠나고 싶었다. 내내 움츠렸던 몸이 녹아 드는 기분이었다. 공항에서 비자를 구입하고 입국심사를 마친 뒤, 짐을 찾고 같은 날 자카르타에 도착한 한국인 워크캠프 멤버 중 한 명을 만나 함께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 쇼핑몰을 찾았다. 특이한 것은 쇼핑몰 내에 새해를 맞이하는 장식을 굉장히 화려하게 해 놓았는데, 중국의 느낌이 강했다는 것이다. 후에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중국 아래쪽의 동남아 국가들은 거의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여하튼 인도네시아의 이미지는 그랬다. 그리고 깜짝 놀랐던 것은, 식사를 위해 갔던 KFC에서 치킨을 주문했더니 밥을 함께 줬던 점이다. 게다가 밥은 손으로 먹어야 했다. 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 또한 무슬림의 관습 중 하나이다. 오른 손으로는 식사, 왼 손으로는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라 생각하고 생략하겠다. 휴대폰을 개통하려 했는데, 인도네시아에는 아이폰이 아직 대중화 되지 않아서 유심을 구하는데 곤란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인도네시아 현지인이 몇 시간 동안이나 여러 군데의 휴대폰 가게를 함께 데리고 다니며 도와주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결국에는 저렴한 가격에 현지 휴대폰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나라를 도우러 왔다는 말에 자신도 우리의 곤란함을 해결해 주고 싶었다고 하는 그 분에게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순수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캠프지인 족자카르타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호텔 셔틀 버스에서 만났던 현지인 노부부는, 우리에게 어떻게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를 친절히 알려주셨고, 가는 동안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헤어질 때는 가벼운 포옹과 함께 행운을 빈다며 인사를 해 주셨다. 그렇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 인상은 친절함과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30분 정도 비행기를 타고, 드디어 캠프지인 족자카르타에 도착했다. 미팅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다가 미팅포인트에서 다른 한국인 참가자 한 명을 만나고, 이어서 미국인 참가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좀 더 기다리다가 캠프 리더가 와서 우리를 픽업했다. 캠프지로 가는 길에, 차들은 매연을 엄청나게 뿜어댔다. 사람들은 버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고, 오토바이가 줄을 지어 가는 광경에 그제서야 내가 타국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캠프지는 마을의 이장 급이신 분의 가정집이었다. 집은 굉장히 큰 편이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흐려 집안이 어두웠고, 낡아 때묻은 소파와 천장에는 아무렇게나 얽혀진 거미줄이 자리잡고 있었다. 캠프지의 첫 인상은 큰 충격이었다. 밤에는 집을 가로질러 팔뚝만한 쥐가 뛰어다니고, 검지 손가락 만한 바퀴벌레가 매일 나오는 정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얼마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몸소 느끼게 해주는 것인가 깨닫고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아, 또 있네.’ 이 정도로 지나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인심 넉넉한 주인내외분 덕분에 적응도 잘 하고 잘 지내다 왔다. 특히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동네에서 나름 사는 집이어서 그런지, 집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2명이나 있었고 음식 솜씨가 대단했다. 매일매일이 진수성찬이었고, 음식은 어찌나 입에 잘 맞았는지 아직도 틈만 나면 한국의 인도네시아 음식점을 검색해보고 있다. 참고로 인도네시아의 주식은 쌀이다. 게다가 전통음식이라며 우리에게 선보였던 음식들은, 매운 고추가 들어간 볶음밥(나시고랭), 달콤 짭쪼름한 볶음국수(미고랭), 간장소스나 땅콩소스를 곁들인 닭 꼬치(사테아얌) 혹은 닭 튀김(아얌고랭)등 친숙한 맛의 친숙한 음식이었다. 특히 `소또아얌’이라는 음식을 잊을 수가 없다. 쉽게 표현하자면 치킨누들스프 정도의 음식인데, 그 얼큰함은 흡사 한국의 그것과 비슷했다. 어떻게 이 머나먼 타국에서 이런 얼큰함을 맛에 표현할 수 있었을까 아직도 궁금하다. 그리고 매 식사마다 챙겨주시는 디저트로 항상 신선한 열대과일을 맛 볼 수 있었다. 특히 파파야와 망고스틴이 너무 맛있어서 또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분께서 알아들으셨던 모양인지, 망고스틴은 거의 매일 올라왔던 기억이 있다.
캠프지에 여정을 풀고, 처음 이틀은 동네를 둘러보고, 동네 주민들께 인사를 다녔다. 지리상 외국인이 찾기에는 어려운 곳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Klaten이라는 마을은 산이 없어 평평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고, 곳곳에 과일나무가 자라며 마을 대부분의 땅은 농사를 짓는데 쓰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물론 대부분이 농부의 삶을 살고 있었다. 평화로운 지평선 저 멀리에는 불과 2년 전에도 폭발했다던 화산이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Klaten은 조용한 마을이면서 동시에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울리는 그런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배려로 인도네시아의 모습을 배울 기회가 많았다. 장례식에도 다녀오고, 결혼식도 참여하며 인도네시아의 전통 관례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결혼식 같은 경우에는 몇 일 동안이나 계속 되는 마을의 큰 행사이다. 행사 장소 옆에는 간식을 팔거나 장난감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는데, 새로운 것이 올 때 마다 뭐가 왔나, 뭐 맛있는 음식이 있나 궁금해서 구경하러 왔다 갔다 거리자, 결혼식에 참석했던 하객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마구 웃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봉사활동. 우리의 임무는 인근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주된 것이었다. 학교에 가기 전 날, 약 두 시간여 동안 그룹을 나누어 열심히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떠났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약 20분 정도를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외국인 선생님들이 온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이 운동장에 줄을 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초등학교 때 운동장 조회를 하는 모습 같았다. 아이들끼리 국기도 게양하고 뭔가 행사를 진행하는데 솔직히 인도네시아 말을 몰라서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 조그만 손으로 격식을 갖추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캠퍼들의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줄을 서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며 다가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초롱초롱한 눈,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정성스럽게 인사하는데 감동으로 눈물이 흐를 뻔 했다. 환영 행사가 끝나고는 수업이 시작 되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인도네시아 아이들은 사교육이 없어서 가르치는데 어렵지는 않을까 했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이 간단한 영어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고, 우리를 잘 따라주어서 가르치는 내내 우리 캠퍼들도 즐거웠다. 우리는 주로 노래와 게임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지막 날에는 각자의 꿈이 무엇인지 말해보고, 직업을 영어로 이야기 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것이 또 굉장한 임팩트를 남겼다. 어려서부터 물질만능에 찌든 우리나라와는 달리 야채장수가 되고 싶다거나, 트럭운전사, 농부 등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순수 그 자체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 같았던 아이들이 지금도 너무 보고 싶다. 방과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 점심 식사를 하고 약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휴식시간 동안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어떤 소리를 기다린다. 인도네시아 시골마을의 묘미는, 직접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판매하는 간식거리 사먹는 맛에 있다. 특히 `es tong’이라는 아이스크림이 최고였다. 저렴한 가격에 맛까지 좋았기 때문이다. 이 `es tong’ 아저씨는 꽹과리 같은 쇳덩이를 오토바이 옆에 달고 다니며 그것을 치면서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린다. 그 소리가 `tong, tong, tong, tong’하고 들리기 때문에 `es tong’이라고 부른단다. 우리는 이 `es tong’의 열렬한 팬이었다. 한 번은 시간을 놓쳐 `es tong’ 아저씨가 그냥 갔다. 기다리다 지쳐 너무 먹고 싶은 마음에, 찍어두었던 사진을 확대해 아저씨 오토바이 뒤에 적혀있던 휴대폰으로 전화해 “es tong? Es tong!!!! Widodo(집 주인 아저씨 성함) house!!!!”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끊었더니 10분 후에 진짜 `es tong’ 아저씨가 우리 앞에 나타났던 웃긴 일화도 있다. 가끔 학교 아이들이 방과후에 우리를 따라 집으로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날이면 es tong 아저씨의 지갑이 두둑해지기도 했다. 아는 모든 인도네시아 말을 동원해 es tong 아저씨에게 “내일 1시에 여기서 보자”라고 했더니 그 다음 날 정확히 1시에 와 주었던 성실한 es tong 아저씨가 그립다. 달콤한 휴식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학교로 갔다. 아이들을 위한 책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우리가 일하는 모습을 보려고 학교에 왔다. 한 쪽에서는 열심히 책장을 만들고, 한 쪽에서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모습이 연출되었고 나는 주로 아이들과 놀아주는 담당이었다. 책장 만드는 데에는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하지 못했던 점은 반성해야 마땅하지만, 나름대로 아이들이랑 놀면서 아이들이 위험하지 않도록 하거나, 아이들에게 얻은 구아바 같은 과일들을 캠퍼들에게 가져다 주는 역할을 했다. 사실 변명이다. 어쨌든 책장을 만드는 일이 끝 난 뒤에는, 마을 유치원에 페인트를 칠하고 나무를 심는 등의 활동도 했다. 피곤했지만 우리가 해놓은 성과들을 보며 매우 뿌듯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시간마다 동네 전체에 울려펴지던 `Arsen’이라는 무슬림 기도 소리였다. 종교의식을 할 때에 사람들이 돌아가며 한 사람씩 마이크에 대고 의식의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고 한다. 스피커로 울려퍼지는 노래가 좋아서, 노래가 나오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우두커니 서서 감상하곤 했다. 활동이 없는 주말동안에는 족자카르타의 명소지인 프람바난 사원이나 보로부두르 사원을 찾기도 하고, 화산을 오르거나 래프팅을 하는 등 즐거운 여가시간을 즐겼다. 또 중간중간 들리게 된 쇼핑몰이나 말리보로 같은 시장을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를 환송하기 위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학교에서는 화려한 음식과 함께 아이들의 장기자랑이 이어졌고, 우리도 보답으로 자그마한 공연을 선 보였다. 그리고 집에서는 주인 내외분께서 소규모 밴드와 합창단을 초청하여 우리를 위해 밤새 풍악을 울렸다. 그러던 중 캠퍼 한 명이 일정 상 먼저 떠나게 되었고, 그제서야 끝났구나 이제 헤어지는구나 하는 섭섭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다음 날에는 잠시 학교에 들렀다가 아이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울며 집까지 따라왔다. 서툰 영어로 “우리는 자매에요.”하던 아이들의 말에 눈물이 났다. 어디선가 꽃을 따와 귀에 꽂아주고,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주던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다음에 만나자 약속하며 아쉬움의 시간을 보냈다. 떠날 시간이 되자, 외출했던 주인 내외분이 돌아오셨다. 호칭을 어찌해야 할 지 몰라 Aya(아빠), Ibu(엄마)라고 불렀던 주인 내외분을 보자 또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나를 안아주시며 함께 우시던 나의 인도네시아 부모님도 너무너무 보고 싶다.
비록 2주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몸소 겪어보며 인생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인도네시아의 Klaten 마을은, 사람들의 순수함과 따뜻함 그리고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배우고, 또 여러 나라에서 모인 캠퍼들과 정을 나누며 지냈던 그 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직도 그 때 찍었던 사진을 보며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더운 여름의 나라에서 생활하며 피부가 거의 인도네시아 현지인만큼이나 까매졌는데, 거울을 볼 때 마다 뿌듯하다. 꼭 온 몸에 그 추억을 새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혼자서라도 다시 찾아가고픈 고향 같은 곳, Aku Cinta Indonesia!
사실 아프리카를 갈 생각으로 워크캠프를 신청했다가 마지막에 급히 행선지를 바꾸었다. 선택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고, 그 중 하나가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사전 지식이 거의 없었다. 국교가 무슬림이라는 것도 이번 활동을 위해 사전 조사를 하던 중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무슬림이라면 중동 사람들만 믿는 종교라고 생각했었다. 홍콩에서 인도네시아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까무잡잡한 피부의 동남아사람들이 히잡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를 느꼈다. 그리고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9살 난 인도네시아 여자아이와의 대화와 함께 내 몸은 점점 더 인도네시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카르타에 내리자마자 더운 공기가 온몸에 착착 달라붙었다. 한국의 추운 겨울이 싫었다. 그래서 더더욱 하루 빨리 여름의 나라로 떠나고 싶었다. 내내 움츠렸던 몸이 녹아 드는 기분이었다. 공항에서 비자를 구입하고 입국심사를 마친 뒤, 짐을 찾고 같은 날 자카르타에 도착한 한국인 워크캠프 멤버 중 한 명을 만나 함께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 쇼핑몰을 찾았다. 특이한 것은 쇼핑몰 내에 새해를 맞이하는 장식을 굉장히 화려하게 해 놓았는데, 중국의 느낌이 강했다는 것이다. 후에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중국 아래쪽의 동남아 국가들은 거의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여하튼 인도네시아의 이미지는 그랬다. 그리고 깜짝 놀랐던 것은, 식사를 위해 갔던 KFC에서 치킨을 주문했더니 밥을 함께 줬던 점이다. 게다가 밥은 손으로 먹어야 했다. 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 또한 무슬림의 관습 중 하나이다. 오른 손으로는 식사, 왼 손으로는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라 생각하고 생략하겠다. 휴대폰을 개통하려 했는데, 인도네시아에는 아이폰이 아직 대중화 되지 않아서 유심을 구하는데 곤란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인도네시아 현지인이 몇 시간 동안이나 여러 군데의 휴대폰 가게를 함께 데리고 다니며 도와주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결국에는 저렴한 가격에 현지 휴대폰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나라를 도우러 왔다는 말에 자신도 우리의 곤란함을 해결해 주고 싶었다고 하는 그 분에게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순수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캠프지인 족자카르타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호텔 셔틀 버스에서 만났던 현지인 노부부는, 우리에게 어떻게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를 친절히 알려주셨고, 가는 동안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헤어질 때는 가벼운 포옹과 함께 행운을 빈다며 인사를 해 주셨다. 그렇게 인도네시아에서의 첫 인상은 친절함과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30분 정도 비행기를 타고, 드디어 캠프지인 족자카르타에 도착했다. 미팅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다가 미팅포인트에서 다른 한국인 참가자 한 명을 만나고, 이어서 미국인 참가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좀 더 기다리다가 캠프 리더가 와서 우리를 픽업했다. 캠프지로 가는 길에, 차들은 매연을 엄청나게 뿜어댔다. 사람들은 버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고, 오토바이가 줄을 지어 가는 광경에 그제서야 내가 타국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캠프지는 마을의 이장 급이신 분의 가정집이었다. 집은 굉장히 큰 편이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흐려 집안이 어두웠고, 낡아 때묻은 소파와 천장에는 아무렇게나 얽혀진 거미줄이 자리잡고 있었다. 캠프지의 첫 인상은 큰 충격이었다. 밤에는 집을 가로질러 팔뚝만한 쥐가 뛰어다니고, 검지 손가락 만한 바퀴벌레가 매일 나오는 정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얼마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몸소 느끼게 해주는 것인가 깨닫고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아, 또 있네.’ 이 정도로 지나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인심 넉넉한 주인내외분 덕분에 적응도 잘 하고 잘 지내다 왔다. 특히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동네에서 나름 사는 집이어서 그런지, 집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2명이나 있었고 음식 솜씨가 대단했다. 매일매일이 진수성찬이었고, 음식은 어찌나 입에 잘 맞았는지 아직도 틈만 나면 한국의 인도네시아 음식점을 검색해보고 있다. 참고로 인도네시아의 주식은 쌀이다. 게다가 전통음식이라며 우리에게 선보였던 음식들은, 매운 고추가 들어간 볶음밥(나시고랭), 달콤 짭쪼름한 볶음국수(미고랭), 간장소스나 땅콩소스를 곁들인 닭 꼬치(사테아얌) 혹은 닭 튀김(아얌고랭)등 친숙한 맛의 친숙한 음식이었다. 특히 `소또아얌’이라는 음식을 잊을 수가 없다. 쉽게 표현하자면 치킨누들스프 정도의 음식인데, 그 얼큰함은 흡사 한국의 그것과 비슷했다. 어떻게 이 머나먼 타국에서 이런 얼큰함을 맛에 표현할 수 있었을까 아직도 궁금하다. 그리고 매 식사마다 챙겨주시는 디저트로 항상 신선한 열대과일을 맛 볼 수 있었다. 특히 파파야와 망고스틴이 너무 맛있어서 또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분께서 알아들으셨던 모양인지, 망고스틴은 거의 매일 올라왔던 기억이 있다.
캠프지에 여정을 풀고, 처음 이틀은 동네를 둘러보고, 동네 주민들께 인사를 다녔다. 지리상 외국인이 찾기에는 어려운 곳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Klaten이라는 마을은 산이 없어 평평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고, 곳곳에 과일나무가 자라며 마을 대부분의 땅은 농사를 짓는데 쓰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물론 대부분이 농부의 삶을 살고 있었다. 평화로운 지평선 저 멀리에는 불과 2년 전에도 폭발했다던 화산이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Klaten은 조용한 마을이면서 동시에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울리는 그런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배려로 인도네시아의 모습을 배울 기회가 많았다. 장례식에도 다녀오고, 결혼식도 참여하며 인도네시아의 전통 관례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결혼식 같은 경우에는 몇 일 동안이나 계속 되는 마을의 큰 행사이다. 행사 장소 옆에는 간식을 팔거나 장난감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는데, 새로운 것이 올 때 마다 뭐가 왔나, 뭐 맛있는 음식이 있나 궁금해서 구경하러 왔다 갔다 거리자, 결혼식에 참석했던 하객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마구 웃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봉사활동. 우리의 임무는 인근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주된 것이었다. 학교에 가기 전 날, 약 두 시간여 동안 그룹을 나누어 열심히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떠났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약 20분 정도를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외국인 선생님들이 온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이 운동장에 줄을 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초등학교 때 운동장 조회를 하는 모습 같았다. 아이들끼리 국기도 게양하고 뭔가 행사를 진행하는데 솔직히 인도네시아 말을 몰라서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 조그만 손으로 격식을 갖추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캠퍼들의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줄을 서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며 다가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초롱초롱한 눈,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정성스럽게 인사하는데 감동으로 눈물이 흐를 뻔 했다. 환영 행사가 끝나고는 수업이 시작 되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인도네시아 아이들은 사교육이 없어서 가르치는데 어렵지는 않을까 했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이 간단한 영어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고, 우리를 잘 따라주어서 가르치는 내내 우리 캠퍼들도 즐거웠다. 우리는 주로 노래와 게임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지막 날에는 각자의 꿈이 무엇인지 말해보고, 직업을 영어로 이야기 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것이 또 굉장한 임팩트를 남겼다. 어려서부터 물질만능에 찌든 우리나라와는 달리 야채장수가 되고 싶다거나, 트럭운전사, 농부 등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순수 그 자체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 같았던 아이들이 지금도 너무 보고 싶다. 방과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 점심 식사를 하고 약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휴식시간 동안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어떤 소리를 기다린다. 인도네시아 시골마을의 묘미는, 직접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판매하는 간식거리 사먹는 맛에 있다. 특히 `es tong’이라는 아이스크림이 최고였다. 저렴한 가격에 맛까지 좋았기 때문이다. 이 `es tong’ 아저씨는 꽹과리 같은 쇳덩이를 오토바이 옆에 달고 다니며 그것을 치면서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린다. 그 소리가 `tong, tong, tong, tong’하고 들리기 때문에 `es tong’이라고 부른단다. 우리는 이 `es tong’의 열렬한 팬이었다. 한 번은 시간을 놓쳐 `es tong’ 아저씨가 그냥 갔다. 기다리다 지쳐 너무 먹고 싶은 마음에, 찍어두었던 사진을 확대해 아저씨 오토바이 뒤에 적혀있던 휴대폰으로 전화해 “es tong? Es tong!!!! Widodo(집 주인 아저씨 성함) house!!!!”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끊었더니 10분 후에 진짜 `es tong’ 아저씨가 우리 앞에 나타났던 웃긴 일화도 있다. 가끔 학교 아이들이 방과후에 우리를 따라 집으로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날이면 es tong 아저씨의 지갑이 두둑해지기도 했다. 아는 모든 인도네시아 말을 동원해 es tong 아저씨에게 “내일 1시에 여기서 보자”라고 했더니 그 다음 날 정확히 1시에 와 주었던 성실한 es tong 아저씨가 그립다. 달콤한 휴식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학교로 갔다. 아이들을 위한 책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우리가 일하는 모습을 보려고 학교에 왔다. 한 쪽에서는 열심히 책장을 만들고, 한 쪽에서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모습이 연출되었고 나는 주로 아이들과 놀아주는 담당이었다. 책장 만드는 데에는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하지 못했던 점은 반성해야 마땅하지만, 나름대로 아이들이랑 놀면서 아이들이 위험하지 않도록 하거나, 아이들에게 얻은 구아바 같은 과일들을 캠퍼들에게 가져다 주는 역할을 했다. 사실 변명이다. 어쨌든 책장을 만드는 일이 끝 난 뒤에는, 마을 유치원에 페인트를 칠하고 나무를 심는 등의 활동도 했다. 피곤했지만 우리가 해놓은 성과들을 보며 매우 뿌듯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시간마다 동네 전체에 울려펴지던 `Arsen’이라는 무슬림 기도 소리였다. 종교의식을 할 때에 사람들이 돌아가며 한 사람씩 마이크에 대고 의식의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고 한다. 스피커로 울려퍼지는 노래가 좋아서, 노래가 나오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우두커니 서서 감상하곤 했다. 활동이 없는 주말동안에는 족자카르타의 명소지인 프람바난 사원이나 보로부두르 사원을 찾기도 하고, 화산을 오르거나 래프팅을 하는 등 즐거운 여가시간을 즐겼다. 또 중간중간 들리게 된 쇼핑몰이나 말리보로 같은 시장을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를 환송하기 위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학교에서는 화려한 음식과 함께 아이들의 장기자랑이 이어졌고, 우리도 보답으로 자그마한 공연을 선 보였다. 그리고 집에서는 주인 내외분께서 소규모 밴드와 합창단을 초청하여 우리를 위해 밤새 풍악을 울렸다. 그러던 중 캠퍼 한 명이 일정 상 먼저 떠나게 되었고, 그제서야 끝났구나 이제 헤어지는구나 하는 섭섭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다음 날에는 잠시 학교에 들렀다가 아이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울며 집까지 따라왔다. 서툰 영어로 “우리는 자매에요.”하던 아이들의 말에 눈물이 났다. 어디선가 꽃을 따와 귀에 꽂아주고,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주던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다음에 만나자 약속하며 아쉬움의 시간을 보냈다. 떠날 시간이 되자, 외출했던 주인 내외분이 돌아오셨다. 호칭을 어찌해야 할 지 몰라 Aya(아빠), Ibu(엄마)라고 불렀던 주인 내외분을 보자 또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나를 안아주시며 함께 우시던 나의 인도네시아 부모님도 너무너무 보고 싶다.
비록 2주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몸소 겪어보며 인생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인도네시아의 Klaten 마을은, 사람들의 순수함과 따뜻함 그리고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배우고, 또 여러 나라에서 모인 캠퍼들과 정을 나누며 지냈던 그 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직도 그 때 찍었던 사진을 보며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더운 여름의 나라에서 생활하며 피부가 거의 인도네시아 현지인만큼이나 까매졌는데, 거울을 볼 때 마다 뿌듯하다. 꼭 온 몸에 그 추억을 새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혼자서라도 다시 찾아가고픈 고향 같은 곳, Aku Cinta Indone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