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데벤테르, 13명의 소중한 비밀친구

작성자 지연정
네덜란드 SIW 12-06 · ENVI 2012. 08 - 2012. 09 Deventer, Diepenveen

Historical Landscape IJssellandschap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까치발을 해야 간신히 발이 닿는 높은 자전거를 타고 이쪽저쪽으로 누비고 다녔던 15일 동안의 워크캠프가 끝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하지만 자전거 위에서 보았던 바람에 흔들리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도 잊히질 않는다.
8월 25일 아침,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심호흡도 몇 번 하고 모두를 만나기로 되어있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기차에 오르면서 본 새파란 아침 하늘은 우리들의 첫 만남을 축복해주듯 청명하고 산뜻했다. 그런데 정작 약속 장소에 다다르자 하늘이 순식간에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내가 비를 몰고 왔다며 한바탕 웃었고 이내 다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갑자기 내렸던 세찬 소나기처럼 우리 14명은 네덜란드 데벤테르(Deventer)라는 곳에서 그렇게 갑자기 만났다.
데벤테르는 네덜란드 동쪽에 위치해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 근처에 다이어펜빈(Diepenveen)이라는 시골 마을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다이어펜빈(Diepenveen)은 짙푸른 녹음과 상쾌한 공기, 아기자기한 집들, 그리고 인정 넘치는 네덜란드 사람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유쾌하고 행복한 에너지가 넘치는 14명의 소년, 소녀들이 모여들었다. 이번 IJssellandschap 프로젝트의 리더를 맡았던 Frank와 Nico, 한국에서 온 Yeon(나)과 Jina, 스페인에서 온 Maria와 Eloi, 터키 친구들 Burak과 Tufan, 독일인 Milena, 오스트리아에서 온 Bernhard, 체코에서 온 두 소녀 Petra와 Monika, 프랑스인 Florent, 마지막으로 폴란드에서 온 Adrian까지 총 7개국에서 참 다양한 사람들이 워크캠프를 계기로 한 자리에 모였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힘이 되고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서 말이다.
워크캠프 기간 내내 나는 무척 행복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고 오늘은 어떻게 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나 하는 기대감에 설렜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넓은 식탁에 앉아 모두 함께 아침을 먹는 일이었는데 이 1시간이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순간이었다.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을 이 친구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는 건 내게 정말 특별했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담긴 “Good morning"이라는 인사는 진한 초콜릿처럼 달콤했고 절로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향이 좋은 치즈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면 숲으로 가기 위해 자전거를 타러 간다. 솔직히 자전거를 타기에는 이 무렵의 아침 날씨가 상당히 추웠다. 하지만 추위를 이겨내고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으면 찬바람에 몸이 시리다가도 점점 땀이 나고 몸이 더워진다. 헉헉 대는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찬바람은 이내 상쾌한 아침 공기가 되어 발갛게 상기된 볼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는데 그 느낌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차갑고 깨끗한 아침 공기, 울창하고 생명력 넘치는 푸른 숲과 쿵쾅쿵쾅 뛰는 심장소리는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워크캠프 기간 동안 우리가 했던 일은 커다란 숲속에서 너무 우거져서 아름다운 경치를 해치는 나무를 베어내고 숲을 더욱 아름답게 다듬는 일이었다. 오전 9시~오후 4시까지 일을 했고 중간에 12시부터 1시까지는 점심을 먹었다. 숲속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일을 하는 건 정말이지 어디서도 해보지 못할 값진 경험이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거라 나무를 베는 일이 그렇게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나무의 굵기도 제각각이라 굵기에 따라 큰 톱, 작은 톱, 가위를 바꿔가며 나무를 베야 했고 벤 나무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으로 옮겨야 해서 일하는 내내 앉았다 섰다 계속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각자 일하고 있다가도 누군가가 혼자 베기에는 벅찬 나무를 베려고 하거나 이미 베어낸 나무를 옮기려고 할 때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가까이에 있는 친구가 다가와서 “같이 하자.” 하고 말하며 그를 도와주었다. 함께 무거운 나무를 옮기고 나면 서로를 쳐다보고 싱긋 웃고는 쉬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을 도와주러 간다. 아직은 어색했을지도 모를 첫날부터 우리는 서로를 돕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정해진 시간보다 더 일찍 그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일하던 숲은 이곳이 처음 우리가 봤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변해갔다. 죽은 가시나무가 뒤엉켜 있던 덤불을 다 끌어내고 나니 덤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보니 그 동안 나무 베느라 힘들었던 것들이 싹 잊히는 것 같았다. 우리들 모두 우리 손으로 만든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었다.
일을 마친 후 다시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려 숙소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저녁식사 준비가 시작된다. 캠프 참가자들의 국적이 다양했던 만큼 매일 저녁 다른 나라의 전통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프랑스인 친구 Florent를 도와주면서 토마토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멋스런 프랑스 요리를 배울 수 있었고, 터키에서 온 멋진 두 남자 Burak과 Tufan이 만든 터키 음식을 먹어본 후에 그동안 이유도 모른 채 지니고 있던 터키 음식에 대한 편견도 싹 사라졌다. 모든 나라의 음식들이 맛있었지만 개인적으로 한국 음식이 영양에 있어서도 맛에 있어서도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나와 Jina가 저녁 식사 당번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불고기와 미역국을 만들어 상에 내놓았다. 달짝지근한 불고기 소스는 유럽 친구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친구들이 좋아할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미역국도 생각했던 것보다 성공적이었다. 생일날 먹는 특별한 음식이라고 소개했더니 다들 신기해했다. 또 한 번 저녁 식사 당번이 되었는데 “한국 음식! 한국 음식!” 하고 열광하는 이들을 위해 잡채를 만들었다. 실은 잡채를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걱정을 많이 했었다. 다행히 맛도 좋았고 친구들도 괜찮아하는 눈치였다. 특히 당면을 무척 신기해했다. 참기름 때문에 미끌미끌했을 텐데도 한국음식이니까 젓가락으로 먹겠다며 노력하는 친구들을 보니 참 뿌듯했다. 열렬한 성화에 나는 또 한 번 요리를 했다. 워크캠프 마지막 날 협력 기관에서 이곳에서의 캠프를 기획한 코디네이터들과 함께 만찬을 가졌는데 이때 전채 요리로 해물파전을 선보였다. 모두들 내게 맛있다고 수고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이 음식들 덕분에 나는 우리 캠프 내에서 ‘최고의 요리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렇게 한국 음식을 신기해하고 또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니까 떡, 두부, 만두를 이용한 요리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또 스페인 친구들이 만든 카탈루냐 지방의 전통 디저트를 먹으면서 식혜, 수정과, 한과와 같이 디저트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한국에서 챙겨올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 번 워크캠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좀 무겁더라도 맛좋고 몸에도 좋은 이 음식들을 꼭 챙겨가야겠다.
일하는 시간 외에는 참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했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두 가지 활동이 있는데 하나는 각국의 전통춤을 배웠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둥글게 앉아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Secret Game'이다. 전통춤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하자면, 친구들로부터 춤추는 걸 배우면서 처음으로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춰봤다. 체코의 춤 폴카, 손가락을 이용해 여유롭게 추는 터키의 춤, 사과를 따먹는 동작을 응용한 스페인의 춤, 마치 기차놀이 하는 것 같았던 네덜란드의 춤, 그리고 리더 Frank가 우간다 친구에게서 배운 풍년을 기원하는 춤까지 총 5가지 색다른 춤을 배웠다. 그리고 나도 유럽 친구들에게 한국의 덩실덩실 어깨춤을 가르쳐주었다. 춤을 추는 내내 우리 모두 열의를 보였고 하나라도 놓칠 세라 다들 집중했다. 각 나라의 전통춤은 그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모두 함께 흥겹게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모두들 즐겁게 춤을 추며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때 배운 춤을 워크캠프가 끝날 때까지 춤출 기회만 생기면 다함께 췄고 춤을 통해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다들 사소한 것 하나에도 웃음을 터트리고 춤추는 걸 좋아하고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 같았는데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 했던 ‘Secret Game’을 하는 동안엔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모두가 진지했다. 자신이 가진 고민과 어려움, 불안함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모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공감하기도 하고 때론 그들을 위로하기도 하며 각자가 지닌 아픔을 다독여주었다. 만난 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우정을 나눈 친구처럼 편안했고 따뜻했다. 놀라웠던 건 그 어떤 객관적인 이유도 없이 그저 ‘이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나 혼자만 알고 있었던 나의 비밀,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지금껏 꽁꽁 숨겨두었던 나의 고독한 비밀을 이들 앞에서 풀어냈다. 찬찬히 이야기해주고 싶었는데 말하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는데 입을 뗀 그 순간부터 목소리가 떨려왔고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슬픔이 가득 베인 눈물을 다 쏟아낼 때까지 모두들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며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친구들의 눈이 보였고 그 눈을 보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중에 다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면 옆에 있는 친구들이 내 어깨를 감싸 안고 “그런 거지?” 하고 물어봐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을 다 이야기하고 나서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내 비밀을 들어주어서 고마워.” 하고 말을 마쳤더니 다들 내게 와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친구들의 온기로 인해 나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시간만큼은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친구들로부터 가슴 뜨거운 위로를 받았고 또 나에게 내어준 소중한 마음 한 켠의 따스함도 충분히 느꼈다.
시간이 흘러 절대 올 것 같지 않았던 9월 9일, 우리의 워크캠프가 끝나는 날이 왔다. 15일 동안 옹기종기 모여 잠들었던 숙소에서 내 침낭을 치우고 그 빈자리를 보니 이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서로를 꼭 끌어안고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기 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우리는 이별을 받아들였다.
나는 워크캠프를 통해 유럽이라는 먼 대륙에서 저마다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13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들 덕분에 나는 유럽으로 떠나기 전보다 더 용감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13명의 친구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위로 쏟아졌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그들 덕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