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케냐, 상상 그 이상의 아프리카를 만나다
KAMAGAP PRIMARY SCHOOL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1. 바로 그 아프리카
지난 8월. 내생애 처음으로 혼자, 그리고 모든 자비를 손수 장만하여 우리 머릿속의 상상속에 있는 ‘그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목적은 간단했다. 내 관심분야가 국제개별협력이였기에 도대체 필드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나는 거리모금가로 약 6개월 여를 일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현지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알리며 함께 돕자고 독려하는 역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계절동안 내가 국제기구의 리포트에서, 현장르포에서, 사진에서 보았던 내용들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 느껴보고 싶었다.
케냐는 아프리카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축에 속한다. 수많은 국제기구와 비영리단체들의 본부가 몰려있기도 하고, 인근 탄자니아와 함께 사파리로 관광산업을 이어나가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느낌은, 우리나라의 중소도시 못지 않았다. 황량할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예상이 정확히 빗나갔다. 한국의 이마트와 같은 대형 마트 체인점도 있고, 평수 넓은 아파트에, 경비원이 딸린 유명 커피전문점도 있었다. KVDA센터 역시 부촌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치안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14시간 만에 도착한 케냐.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만화 ‘라이언킹’에서 원숭이주술사 라피키가 부르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슴 벅차는 순간이 시작됐다. 처음 일기장에 적은 말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나는 워크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하루 정도 나이로비 시티투어를 하고, 케냐의 느낌에 조금 적응을 할 수 있다. 현지인 드라이버와 함께 카렌하우스(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실제 여주인공이 살던 집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시티센터, 박물관, 패스트푸드점을 견학하며 현지인들과 언어에 적응했다. 알다시피 영국 식민지였기에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였으나, 현지 특유의 억양이나 슬랭과 섞여 짧은 영어로는 간혹 못 알아들을 경우가 생겼다. 또 평생 그렇게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접하는 것도 처음이므로, 드라이버와 돌아다니면서 혼자 관광객차림인 아시아, 그것도 비교적 생소한 한국인으로서 주목을 받을 때도 있었다.
2. 똑같은 꿈도 맛이 다르다
현지 자원봉사센터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워캠퍼들끼리 친해지는 open ceremony이다. 간단한 게임으로 상대방의 이름도 익히고, 각 캠프 사이트camp site별로 나뉘어서는 왜 워크캠프에 참가하게 되었고, 우리가 현장에 간다면 어떤 일들을 규칙으로 지켜야 할 지, 마음가짐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함께 정했다. 신기하게도 당시 워크캠프에 참가하는 아시안이자 코리안이 나 혼자였기에, 오히려 유럽 참가자들에 비해 내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프리카를 체험해보고 싶은 사람, 다양한 사람들을 일을 하면서 만나고 싶다는 사람, 나처럼 국제개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 등. 아프리카에 온 저마다의 꿈의 ‘맛’은 모두 달랐다. 학생부터 연차를 내고 온 직장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렸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다는 오스트리아 여자애는 직전에 인도여행을 다녀와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육체적인 일이든 물질적인 기여든) 하겠다는 포부가 인상깊었다. Civil engineering을 전공한다는 이탈리아에서 온 학생, 스페인에서 온 기자, social worker, qualified nurse 등으로 이루어졌다. 현지 캠프리더들도 모두 학생이었고, 가장 어린 친구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모두들 문화교류를 원했고, 세계 모든이들에게 미지의 세계인 ‘아프리카’를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3. Don’t work for us, just work together!
내 입장에서 나는 자원 봉사자였다. 내가 원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케냐에 갔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내가 먼저 나서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뭔가를 ‘해야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어느 날은, 우리가 일하던 초등학교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현지 주민들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좀 더 빨리할 수 있는 일에 시간을 끈다고 캠프리더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리고 내가 캠프리더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워크캠퍼들이 물론 색다른 생활방식을 이해하고, voulunteer로서 참가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현지 주민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므로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워캠 시작 전에는 그들로부터 충분히 배우고, 현지에서의 삶을 즐기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 막상 내가 ‘한국스타일(빠릿빠릿하고 화끈한 성격)’로 일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캠에서 중요한 것은 일을 얼마나 빨리 끝나고 얼마나 완성도가 높은 것인지가 아니다. 현지 주민들과 충분히 대화하고, 우리가 하려는 일을 이해받고, 그들의 참여를 통해 최선의 목표달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의 방문은 일종의 이벤트였으므로, 일을 진전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우리를 더 많이 알기를 원했다. 더 자주 차를 함께 마시고, 시시콜콜하더라도 그 나라의 문화나 날씨, 시간대, 가족소개, 이름을 짓는 방법 등을 공감하기는 바랐던 것이다. 유럽참가자들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다 나은 위치라고 여겼던 오만함, 어려운 처지의 이들에게 도움을 줘야한다는 동정심이 무의식중에 드러났는데, 이런 자세를 반성하는 계기다 됐다.
4. Pole Pole, Hakuna matata
현지 생활 중에 가장 힘든 것은 시간약속이었다. 우리나라도 한때 코리안타임이라고 해서 시간약속을 지키기 않는 면이 후진국의 면모로 비판을 받았던 적이 있다. 시외버스를 타더라도,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승객들이 모두 채워져야 출발을 했다. 클로징세레모니를 위해 9시 까지 현장에 도착해야했는데, 행사는 12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롭고 시간에 대해서는 몇 시, 몇 분이 아니라 언제 쯤~ 얼마 쯤~ 이라는 표현을 즐겨했다.
한 번은 지역에서 유명한 Nandi Rock(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을 트레킹간 적이 있는데. 숙소에서 약 두 시간 정도 거리를 걸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끝없이 길어지는 길 위에서 우리는 가는 데만 무려 세 시간을 쏟아부었다. 라이온킹에서 심바가 포효하던 바위도 보고, 점심으로 싸간 구운 옥수수(케냐에서는 옥수수를 구워먹었다! 팝콘 맛이 미묘하게 나지만 엄청나게 딱딱했다. 기호에 따라 칠리가루를 레몬에 찍어 먹을 수도 있다)와 비스킷으로 허기를 달래고서 다시 세 시간을 걸어 돌아갈 생각에 눈 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많났던 한 선생님이 목마르고 지친 우리에게 콜라도 대접해주고 (먼 데서 손님이 왔다고 길에 나와 대접해주려는 현지인이 정말 많았다!), 자기가 마을 개발을 위해 하려는 녹색관광사업도 소개하면서 케냐의 미래이야기에 대해서 중요한 대화도 나눴다.
케냐는 정말 인도만큼이나 짜여진 스케줄이 무용지물한 나라이다. Pole pole 천천히, hakuna matata 문제없어. 그런 표현들을 실제로 그렇게나 많이 들을 줄 몰랐다. 쉬엄쉬엄 여유를 가지고 있다보면 눈 앞에 닥친일도 그리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콜라를 대접해주셨던 선생님 아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절반 이상의 길을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선생님은 우리가 일하는 학교 선생님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었다. 케냐에서는 이와 같은 경험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한국에 돌아와서는 내 스스로의 행동에 여유있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5. 에드윈 이야기
가장 처음 사진에서 맨 오른쪽 빨간 풀오버를 입고 있는 아이가 바로 에드윈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중학교 1학년 쯤 된 에드윈은 소위 ‘거리의 아이’였다. 어머니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자살을 한 상황이었다. 삼촌이 있었지만 에드윈을 정성껏 부양해주지는 못해보였다. 숙소 바로 뒤에는 난디 지역 전통주인 Changa창아(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발효주. 워캠퍼들도 잠깐 를 빚는 곳이 있었다. 아이들을 돌봐야할 부모는 종일 술을 빚으며 취해있고, 아이들은 달달한 술찌꺼기를 먹고 취해있었다. 처음 도착한 마을은 매일 아침 상냥하게 인사해주는 사람들, 어떤 일이든 기꺼이 우리 일을 돕는 아이들로 천국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에드윈과 같은 아이들이 한 두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워낙 많고, 자녀의 소중함, 교육의 중요성보다는 돈이 우선시 되어 아이들이 적장한 보호를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에드윈은 스스로의 식사를 마련해주기 위해 돈벌이를 해야했으며, 교복을 구매하지 못해 학교에도 못 나가고 있었다. 케냐는 초등교육을 의무교육이며 무료로 진행하고 있지만 정작 주민들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참가자와 함께 에드윈에게 교복도 사주고 학교에서 필요할 물건, 응급약 등을 사주고 학교에 꼬박꼬박 나갈 것을 다짐받았다. 이 외에도 너무 어린나이에 엄마가 되는 여자아이들, 에이즈검사를 제때 하지 않아 질병이 퍼진 줄도 모르는 엄마 들 등, 생각보다 마음의 문제점은 심각해보였다. 우리가 모든 일을 돈으로만 해결 할 수 없었고, 이미 지역의 분위기로 굳어진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해결하기에는 아마추어 봉사자인 우리의 힘이 미력했다. 또 한 두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주다보면 주변 아이들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차별을 느끼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을 수 없다면, 한 두아이에게만 정을 주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행복하고 뿌듯했던 기억과는 별개로, 현지의 모습은 안타깝고 속상한 점이 무척 많았다. 임시 방편으로 우리는 인근 ‘거리의 아이들’과 보건소에 들러 에이즈검사를 받았고, 다행히 양성반응이 나온 아이는 없었다. 임신한 것처럼 보이는 큰 여자아이에게는 임신테스트를 받게하고 싶었지만, 스스로의 상황이 두렵고 용기가 없었는지, 실제로 테스트를 실행할 순 없었다.
6. Athlete theme, 칼렌진처럼!
우리가 있는 Nandi지역은 마라토너로 유명한 동네이다. 실제로 이번 마라톤에서 우승한 1위와 2위 선수가 모두 이 지역 출신이라고 했다. Highland라 불릴 정도로 고도도 높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없어 자연스럽게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온단다. 끼니도 부실하고, 늘 무거운 물을 뜨러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성장에 문제가 생기거나 침울한 모습일꺼라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다리도 쭉쭉 길고 초등학생인데도 체격이 좋은 아이들이 적잖이 당황하기까지 했다. 키가 작은 내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 스무 살 넘은 누나나 언니가 아니라 외려 동생처럼 보이기까지했다. 마라톤을 잘한다던 그 부족은 칼렌진부족이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돌도 많고 언덕이 많은 동네를 뛰어다니는 동네 꼬마들을 보면, 왜 그 지역에서 마라토너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지 금방 수긍이 간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나는 실제로 마라톤에 나갔었다. 고작 한 달 여간의 시간이었지만, 생각보다 폐활량도 많이 증가했고, 달리기에 매력을 느끼는 칼렌진 부족을 본받아 도전에 임한 것이다. 이 사실을 SNS로 알렸더니 ‘너도 칼렌진을 본받아 한국에서 마라톤을 하고 있구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워크캠프의 주제가 athlete이었지만 실제로 이를 경험할 일이 드물었는데, 이렇게 간접적으로 그들의 삶과 행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했다.
7. excursion, 케냐 여행기.
워캠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는 excursion이다. 물론 이 때 발생하는 비용은 추가비용이지만, 인근에서 봉사하는 워캠퍼들과도 다시 만나고, 케냐를 단독으로 여행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참 매력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난디 지역에서 가까 운 Kisunu키수무라는 도시에 갔다. 케냐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고, KVDA의 레지던스가 있는 곳이며, 아프리카에서 손꼽힌다는 빅토리아 호수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Muzungu무중구(외국인)이 단체로 여행을 다니니, 주변에서는 이 기회에 한 몫 잡으려는 케냐인들로 득실됐다. 삼륜택시인 tuk tuk툭툭을 탈 때나 기념품을 사려할 때는 언제나 높은 가격을 불러서 우리는 늘 가격협상을 해야했다. 키수무에서 정말 괜찮은 바를 찾았을 때는, 모두 맥주를 마시며 환호성을 질렀다. 불균형한 영앙공급때문에 정말 ‘맛있는 것’에 지쳐있던 우리는 모처럼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음식도 사먹고 그 동안의 일도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보냈다. 빅토리아 호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수단과 탄자니아 세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야생 하마도 보고, 인근 dunga beach에서 정말 맛있는 생선튀김도 사와서 함께 나눠먹었다. 두 세번쯤 맞는 주말에 특별한 여행을 하고 싶다면, 비용을 넉넉히 준비해가서 봉사자들과 외출하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IWO에서는 권고하지 않는 사항이기도 하나, 마을 간 유일한 이동 수단이 오토바이이기때문에 필연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데 정말 근사한 오토바이 여행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9인승 차량에 20명의 사람들이 낑겨타는 Matatu마타투에 타서 옆자리 사람과 목적지에 대해 대화하는 경험도 정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8. Please remember us not as a voulnteer, just as a friend.
클로징 세레모니를 잊을 수 없다. 어설픈 영어였지만, 우리를 환대해준 마을사람들과 함께 일한 워캠퍼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열심히 작문했던 소감도 엉망이 되었다. 나는 그저 펑펑울기만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정이 들지 몰랐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에게 8월은 정말 꿈 같은 한 달이었다. 꾸역꾸역 울음을 삼키며 했던 말이 바로 ‘우리를 친구로 기억해 달라’였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외국인에다가 다시만날 기약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그리도 친절을 베풀어준 그들에 대한 보답이었다. 워크캠프는 확실히 문화교류와 봉사활동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무엇을 배워오느냐는 스스로의 몫인 것 같다. 나는 워크캠프에서 내가 참여 동기로 작성했던 ‘필드경험’이 아니라, 상상속에서나 기사속에서 존재했던 그 황폐하고 상처많은 아프리카라는, 그 익숙했던 ‘낯선 나라’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새로운 방법과 문화, 방식이었지만 그들 역시 고민하는 것, 바라는 것, 꿈꾸는 것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그 ‘익숙함’을 재확인 받았다.
8월의 케냐는 계절상 겨울이었고 건기였기에, 마치 케냐로 ‘피서’를 떠난 기분이었다.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출국 게이트 앞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던 호스팅 언니와 캠프리더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낼 때는, ‘왜 거기 있어? 당장 돌아와!’ 라는 농담도 주고 받으며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가 never-ending hole이라 불렀던 재래식 화장실, 요리를 하기 위해 불을 피우면 매운 연기로 가득 찼던 한 평짜리 부엌, 방음도, 방온도, 방풍도 안됐던 간이 방, 좁지만 한 개의 모기장을 펼쳐놓고 공간을 나눠야 했던 침대, 늘 먹어 정말 질리기까지 했던 현지식 우갈리(우갈리를 먹으면 튼튼해진다고 그들이 그랬다), 말도 안 되게 긴 거리를 늘 걸어다녔던 사람들의 모습 등.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가져오는 것만은 확실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도 SNS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고, 힘이 들때마다 그 찬란했던 8월의 경험을 떠올리고 있다. 아프리카와 같이 낯선 지역을 도전하는 것에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라도 ‘다시’ 떠나고 싶은 곳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지난 8월. 내생애 처음으로 혼자, 그리고 모든 자비를 손수 장만하여 우리 머릿속의 상상속에 있는 ‘그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목적은 간단했다. 내 관심분야가 국제개별협력이였기에 도대체 필드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나는 거리모금가로 약 6개월 여를 일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현지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알리며 함께 돕자고 독려하는 역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계절동안 내가 국제기구의 리포트에서, 현장르포에서, 사진에서 보았던 내용들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 느껴보고 싶었다.
케냐는 아프리카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축에 속한다. 수많은 국제기구와 비영리단체들의 본부가 몰려있기도 하고, 인근 탄자니아와 함께 사파리로 관광산업을 이어나가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느낌은, 우리나라의 중소도시 못지 않았다. 황량할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예상이 정확히 빗나갔다. 한국의 이마트와 같은 대형 마트 체인점도 있고, 평수 넓은 아파트에, 경비원이 딸린 유명 커피전문점도 있었다. KVDA센터 역시 부촌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치안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14시간 만에 도착한 케냐.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만화 ‘라이언킹’에서 원숭이주술사 라피키가 부르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슴 벅차는 순간이 시작됐다. 처음 일기장에 적은 말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나는 워크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하루 정도 나이로비 시티투어를 하고, 케냐의 느낌에 조금 적응을 할 수 있다. 현지인 드라이버와 함께 카렌하우스(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실제 여주인공이 살던 집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시티센터, 박물관, 패스트푸드점을 견학하며 현지인들과 언어에 적응했다. 알다시피 영국 식민지였기에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였으나, 현지 특유의 억양이나 슬랭과 섞여 짧은 영어로는 간혹 못 알아들을 경우가 생겼다. 또 평생 그렇게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접하는 것도 처음이므로, 드라이버와 돌아다니면서 혼자 관광객차림인 아시아, 그것도 비교적 생소한 한국인으로서 주목을 받을 때도 있었다.
2. 똑같은 꿈도 맛이 다르다
현지 자원봉사센터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워캠퍼들끼리 친해지는 open ceremony이다. 간단한 게임으로 상대방의 이름도 익히고, 각 캠프 사이트camp site별로 나뉘어서는 왜 워크캠프에 참가하게 되었고, 우리가 현장에 간다면 어떤 일들을 규칙으로 지켜야 할 지, 마음가짐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함께 정했다. 신기하게도 당시 워크캠프에 참가하는 아시안이자 코리안이 나 혼자였기에, 오히려 유럽 참가자들에 비해 내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프리카를 체험해보고 싶은 사람, 다양한 사람들을 일을 하면서 만나고 싶다는 사람, 나처럼 국제개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 등. 아프리카에 온 저마다의 꿈의 ‘맛’은 모두 달랐다. 학생부터 연차를 내고 온 직장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렸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다는 오스트리아 여자애는 직전에 인도여행을 다녀와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육체적인 일이든 물질적인 기여든) 하겠다는 포부가 인상깊었다. Civil engineering을 전공한다는 이탈리아에서 온 학생, 스페인에서 온 기자, social worker, qualified nurse 등으로 이루어졌다. 현지 캠프리더들도 모두 학생이었고, 가장 어린 친구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모두들 문화교류를 원했고, 세계 모든이들에게 미지의 세계인 ‘아프리카’를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3. Don’t work for us, just work together!
내 입장에서 나는 자원 봉사자였다. 내가 원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케냐에 갔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내가 먼저 나서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뭔가를 ‘해야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어느 날은, 우리가 일하던 초등학교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현지 주민들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좀 더 빨리할 수 있는 일에 시간을 끈다고 캠프리더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리고 내가 캠프리더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워크캠퍼들이 물론 색다른 생활방식을 이해하고, voulunteer로서 참가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현지 주민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므로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워캠 시작 전에는 그들로부터 충분히 배우고, 현지에서의 삶을 즐기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 막상 내가 ‘한국스타일(빠릿빠릿하고 화끈한 성격)’로 일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캠에서 중요한 것은 일을 얼마나 빨리 끝나고 얼마나 완성도가 높은 것인지가 아니다. 현지 주민들과 충분히 대화하고, 우리가 하려는 일을 이해받고, 그들의 참여를 통해 최선의 목표달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의 방문은 일종의 이벤트였으므로, 일을 진전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우리를 더 많이 알기를 원했다. 더 자주 차를 함께 마시고, 시시콜콜하더라도 그 나라의 문화나 날씨, 시간대, 가족소개, 이름을 짓는 방법 등을 공감하기는 바랐던 것이다. 유럽참가자들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다 나은 위치라고 여겼던 오만함, 어려운 처지의 이들에게 도움을 줘야한다는 동정심이 무의식중에 드러났는데, 이런 자세를 반성하는 계기다 됐다.
4. Pole Pole, Hakuna matata
현지 생활 중에 가장 힘든 것은 시간약속이었다. 우리나라도 한때 코리안타임이라고 해서 시간약속을 지키기 않는 면이 후진국의 면모로 비판을 받았던 적이 있다. 시외버스를 타더라도,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승객들이 모두 채워져야 출발을 했다. 클로징세레모니를 위해 9시 까지 현장에 도착해야했는데, 행사는 12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롭고 시간에 대해서는 몇 시, 몇 분이 아니라 언제 쯤~ 얼마 쯤~ 이라는 표현을 즐겨했다.
한 번은 지역에서 유명한 Nandi Rock(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을 트레킹간 적이 있는데. 숙소에서 약 두 시간 정도 거리를 걸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끝없이 길어지는 길 위에서 우리는 가는 데만 무려 세 시간을 쏟아부었다. 라이온킹에서 심바가 포효하던 바위도 보고, 점심으로 싸간 구운 옥수수(케냐에서는 옥수수를 구워먹었다! 팝콘 맛이 미묘하게 나지만 엄청나게 딱딱했다. 기호에 따라 칠리가루를 레몬에 찍어 먹을 수도 있다)와 비스킷으로 허기를 달래고서 다시 세 시간을 걸어 돌아갈 생각에 눈 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많났던 한 선생님이 목마르고 지친 우리에게 콜라도 대접해주고 (먼 데서 손님이 왔다고 길에 나와 대접해주려는 현지인이 정말 많았다!), 자기가 마을 개발을 위해 하려는 녹색관광사업도 소개하면서 케냐의 미래이야기에 대해서 중요한 대화도 나눴다.
케냐는 정말 인도만큼이나 짜여진 스케줄이 무용지물한 나라이다. Pole pole 천천히, hakuna matata 문제없어. 그런 표현들을 실제로 그렇게나 많이 들을 줄 몰랐다. 쉬엄쉬엄 여유를 가지고 있다보면 눈 앞에 닥친일도 그리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콜라를 대접해주셨던 선생님 아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절반 이상의 길을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선생님은 우리가 일하는 학교 선생님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었다. 케냐에서는 이와 같은 경험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한국에 돌아와서는 내 스스로의 행동에 여유있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5. 에드윈 이야기
가장 처음 사진에서 맨 오른쪽 빨간 풀오버를 입고 있는 아이가 바로 에드윈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중학교 1학년 쯤 된 에드윈은 소위 ‘거리의 아이’였다. 어머니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자살을 한 상황이었다. 삼촌이 있었지만 에드윈을 정성껏 부양해주지는 못해보였다. 숙소 바로 뒤에는 난디 지역 전통주인 Changa창아(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발효주. 워캠퍼들도 잠깐 를 빚는 곳이 있었다. 아이들을 돌봐야할 부모는 종일 술을 빚으며 취해있고, 아이들은 달달한 술찌꺼기를 먹고 취해있었다. 처음 도착한 마을은 매일 아침 상냥하게 인사해주는 사람들, 어떤 일이든 기꺼이 우리 일을 돕는 아이들로 천국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에드윈과 같은 아이들이 한 두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워낙 많고, 자녀의 소중함, 교육의 중요성보다는 돈이 우선시 되어 아이들이 적장한 보호를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에드윈은 스스로의 식사를 마련해주기 위해 돈벌이를 해야했으며, 교복을 구매하지 못해 학교에도 못 나가고 있었다. 케냐는 초등교육을 의무교육이며 무료로 진행하고 있지만 정작 주민들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참가자와 함께 에드윈에게 교복도 사주고 학교에서 필요할 물건, 응급약 등을 사주고 학교에 꼬박꼬박 나갈 것을 다짐받았다. 이 외에도 너무 어린나이에 엄마가 되는 여자아이들, 에이즈검사를 제때 하지 않아 질병이 퍼진 줄도 모르는 엄마 들 등, 생각보다 마음의 문제점은 심각해보였다. 우리가 모든 일을 돈으로만 해결 할 수 없었고, 이미 지역의 분위기로 굳어진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해결하기에는 아마추어 봉사자인 우리의 힘이 미력했다. 또 한 두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주다보면 주변 아이들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차별을 느끼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을 수 없다면, 한 두아이에게만 정을 주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행복하고 뿌듯했던 기억과는 별개로, 현지의 모습은 안타깝고 속상한 점이 무척 많았다. 임시 방편으로 우리는 인근 ‘거리의 아이들’과 보건소에 들러 에이즈검사를 받았고, 다행히 양성반응이 나온 아이는 없었다. 임신한 것처럼 보이는 큰 여자아이에게는 임신테스트를 받게하고 싶었지만, 스스로의 상황이 두렵고 용기가 없었는지, 실제로 테스트를 실행할 순 없었다.
6. Athlete theme, 칼렌진처럼!
우리가 있는 Nandi지역은 마라토너로 유명한 동네이다. 실제로 이번 마라톤에서 우승한 1위와 2위 선수가 모두 이 지역 출신이라고 했다. Highland라 불릴 정도로 고도도 높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없어 자연스럽게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온단다. 끼니도 부실하고, 늘 무거운 물을 뜨러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성장에 문제가 생기거나 침울한 모습일꺼라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다리도 쭉쭉 길고 초등학생인데도 체격이 좋은 아이들이 적잖이 당황하기까지 했다. 키가 작은 내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 스무 살 넘은 누나나 언니가 아니라 외려 동생처럼 보이기까지했다. 마라톤을 잘한다던 그 부족은 칼렌진부족이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돌도 많고 언덕이 많은 동네를 뛰어다니는 동네 꼬마들을 보면, 왜 그 지역에서 마라토너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지 금방 수긍이 간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나는 실제로 마라톤에 나갔었다. 고작 한 달 여간의 시간이었지만, 생각보다 폐활량도 많이 증가했고, 달리기에 매력을 느끼는 칼렌진 부족을 본받아 도전에 임한 것이다. 이 사실을 SNS로 알렸더니 ‘너도 칼렌진을 본받아 한국에서 마라톤을 하고 있구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워크캠프의 주제가 athlete이었지만 실제로 이를 경험할 일이 드물었는데, 이렇게 간접적으로 그들의 삶과 행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했다.
7. excursion, 케냐 여행기.
워캠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는 excursion이다. 물론 이 때 발생하는 비용은 추가비용이지만, 인근에서 봉사하는 워캠퍼들과도 다시 만나고, 케냐를 단독으로 여행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참 매력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난디 지역에서 가까 운 Kisunu키수무라는 도시에 갔다. 케냐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고, KVDA의 레지던스가 있는 곳이며, 아프리카에서 손꼽힌다는 빅토리아 호수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Muzungu무중구(외국인)이 단체로 여행을 다니니, 주변에서는 이 기회에 한 몫 잡으려는 케냐인들로 득실됐다. 삼륜택시인 tuk tuk툭툭을 탈 때나 기념품을 사려할 때는 언제나 높은 가격을 불러서 우리는 늘 가격협상을 해야했다. 키수무에서 정말 괜찮은 바를 찾았을 때는, 모두 맥주를 마시며 환호성을 질렀다. 불균형한 영앙공급때문에 정말 ‘맛있는 것’에 지쳐있던 우리는 모처럼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음식도 사먹고 그 동안의 일도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보냈다. 빅토리아 호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수단과 탄자니아 세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야생 하마도 보고, 인근 dunga beach에서 정말 맛있는 생선튀김도 사와서 함께 나눠먹었다. 두 세번쯤 맞는 주말에 특별한 여행을 하고 싶다면, 비용을 넉넉히 준비해가서 봉사자들과 외출하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IWO에서는 권고하지 않는 사항이기도 하나, 마을 간 유일한 이동 수단이 오토바이이기때문에 필연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데 정말 근사한 오토바이 여행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9인승 차량에 20명의 사람들이 낑겨타는 Matatu마타투에 타서 옆자리 사람과 목적지에 대해 대화하는 경험도 정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8. Please remember us not as a voulnteer, just as a friend.
클로징 세레모니를 잊을 수 없다. 어설픈 영어였지만, 우리를 환대해준 마을사람들과 함께 일한 워캠퍼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열심히 작문했던 소감도 엉망이 되었다. 나는 그저 펑펑울기만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정이 들지 몰랐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에게 8월은 정말 꿈 같은 한 달이었다. 꾸역꾸역 울음을 삼키며 했던 말이 바로 ‘우리를 친구로 기억해 달라’였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외국인에다가 다시만날 기약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그리도 친절을 베풀어준 그들에 대한 보답이었다. 워크캠프는 확실히 문화교류와 봉사활동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무엇을 배워오느냐는 스스로의 몫인 것 같다. 나는 워크캠프에서 내가 참여 동기로 작성했던 ‘필드경험’이 아니라, 상상속에서나 기사속에서 존재했던 그 황폐하고 상처많은 아프리카라는, 그 익숙했던 ‘낯선 나라’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새로운 방법과 문화, 방식이었지만 그들 역시 고민하는 것, 바라는 것, 꿈꾸는 것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그 ‘익숙함’을 재확인 받았다.
8월의 케냐는 계절상 겨울이었고 건기였기에, 마치 케냐로 ‘피서’를 떠난 기분이었다.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출국 게이트 앞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던 호스팅 언니와 캠프리더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낼 때는, ‘왜 거기 있어? 당장 돌아와!’ 라는 농담도 주고 받으며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가 never-ending hole이라 불렀던 재래식 화장실, 요리를 하기 위해 불을 피우면 매운 연기로 가득 찼던 한 평짜리 부엌, 방음도, 방온도, 방풍도 안됐던 간이 방, 좁지만 한 개의 모기장을 펼쳐놓고 공간을 나눠야 했던 침대, 늘 먹어 정말 질리기까지 했던 현지식 우갈리(우갈리를 먹으면 튼튼해진다고 그들이 그랬다), 말도 안 되게 긴 거리를 늘 걸어다녔던 사람들의 모습 등.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가져오는 것만은 확실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도 SNS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고, 힘이 들때마다 그 찬란했던 8월의 경험을 떠올리고 있다. 아프리카와 같이 낯선 지역을 도전하는 것에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라도 ‘다시’ 떠나고 싶은 곳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