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일상 탈출, 이탈리아에서 용기를 얻다

작성자 김서연
이탈리아 CG04 · CULT 2012. 09 Succivo

PARTY&NVIRONMENT TERRA FELIX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드디어 워크캠프를 시작하는 날이 오고, 순간순간 간절하게도 바랐던 ‘일상 탈출’이 펼쳐질 거란 기대에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그 동안의 평탄했던 학교 생활에서 벗어나, 예상할 수 없는 길 안에서 모든 걸 맞서야 한다는 것이 신이 났다. 물론 영어를 잘 하지 못해 겁도 났지만, 오직 나만을 믿어보는 시간이 될 거라 생각하니 오히려 용기가 났다.
나만 미팅 포인트에 늦게 도착하여, 팀 리더와 통화를 하고 역에서 만나 차를 타고 20분 가량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사실 숙소는 생각보다 열악했고, 수영복을 입은 채로 샤워를 해야 했다. 샤워 부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당에 천막을 치고 물통에서 나오는 찬 물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숙소를 비롯한 전반적인 환경은 ‘잘 갖추어졌다’기 보다는 ‘이제 막 만들어 가야 할 것’ 투성이였다. 나는 ‘자원봉사’를 하러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데 어려운 일에도 밝은 애들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나도 나름대로 성실하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일하다 보면 작은 부분에서 야무지게 행동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문화 차이를 실감했는데, 확실히 유럽 쪽이 개방적이었다. 스페인 언니들이나 독일 오빠가 한국 얘기를 듣고 엄격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어색함을 깨고자 반크에서 받아온 지도와 엽서들을 펼쳐 들고, 서로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토모는 K-POP을 정말 좋아했는데 우리에게 “music time~"이라면서 한국 노래를 틀 정도였다. 첫 만남에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비끄방’을 좋아하냐고 대뜸 물었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빅뱅’이었다. 토모 덕분에 fantastic baby를 실컷 들었던 거 같다. 물론 빅뱅이 일본어로 바꿔 부른 노래였는데, 그 외에도 그냥 한국가사 노래들도 mp3에 저장되어 있었다. 또 일본어 버전이라도 한국말이 삽입되어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토모가 “타나가”라고 자꾸 해서 뭔가 했더니 “떠나가”여서 한참을 웃었다. 사실 나도 안 들어본 노래여서 토모한테 알려 주기 위해 노래를 듣고는, 가사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확실히 일본 애랑은 통하는 것도 많고 공유할 수 있는게 많아 편했다. 터키 친구들이랑은 서로 영어를 잘 못해서 긴 대화가 어려웠지만, 눈빛만 봐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며칠은 일이 몹시 힘들었다. 성을 청소하고, 돌을 나르고, 정원 잡초를 뽑았는데 식사가 빵에 치즈와 얇은 햄이 전부였다. 프로그램이 원래 이 정도로 고되지는 않은데, 축제를 코앞에 둬서 그런지, 주최측이 우리보다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지만, 이제는 ‘더 안락한, 즐거운 기회’를 기대하기보다 ‘나를 믿는 기회’를 기대하게 됐다. 내 적응력을 시험하는 기분인데, 사실 점점 놀라고 있다. 열심히 적극적으로 일하던 친구들도 지쳐갈 무렵 오히려 적응해가는 내 모습을 본 것이다. 팀 매니저인 브릿지니아는 힘든 일도 웃으며 한다고 용감하다고 칭찬해주었다. 대화가 잘 안되니까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그러면 적어도 나쁜 인상은 안주겠지, 하는 나름대로는 절박한 마음으로 한 건데,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이었다. 브릿지니아가 칭찬해준 모습은 사실 그토록 보고 싶던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지난 봄 ‘나를 어딘가에 던져놓고 싶어!!’ 라며 소리 지르던 온 몸의 근육들이 튼실하게 뻗어나가는 기분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무렵, 드디어 목소리 큰 마리나, 마르베를 주축으로 불만이 터졌다. 더 이상 빵만 먹고 고된 일을 하기 힘들다며, 팀 리더이게 항의를 하기로 한 것이다. 주어지는 빵이 싫다니, 이제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저녁 당번은 나와 토모, 마르베였다. 두 아이들은 나보다도 더 요리를 못 하는 거 같았고 다행히 온유 언니가 불고기 양념도 가져왔기에, 우리는 ‘불고기’로 정했다. 돼지고기가 있었지만, 터키 아이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먹지 않기에, 닭고기도 준비해서 두 가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12인분의 밥을 하기에는 쌀의 양이 좀 모자란 것 같아, 언니가 가지고 있던 호떡 재료도 총동원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워캠 친구들은 청소든 식사든 당번 역할이 확실하여, 힘들어도 자기가 할 일은 도와달라고 잘 하지 않고,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려 해도 계속 사양을 해왔다. 그런데 내가 반죽을 하고 둥그런 모양으로 호떡 속을 채우는 걸 토모에게 알려주는 걸 보고는 자기들도 도와준다고 나섰다. 다들 너무 좋아했다. 아마도 어느 나라나 이렇게 동그란 반죽에 뭔가를 넣어먹는 요리가 있어서, 다들 해봤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불고기가 완성됐을 때 사람들은 정말 맛있게 먹었고, 스페인 언니인 마르타는 요리법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영어로 레시피를 보내달라고 메일 주소를 알려줄 정도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 팀 리더에게 문제점을 전달한 후에 사람들은 일부러 게임을 제의했고, 우리는 마피아와 카드게임을 했다. 문제점을 얘기한 시간 뒤에 갖는 놀이 시간은 오히려 서로를 돈독하게 하나보다. 그 날 마침 생일인 한국 친구에게 동영상을 보내주려고 다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친구이름을 '방구'로 발음하는 게 너무 웃겼다. 너의 발음이 한국어로는 "뿡"이라고 설명해줬더니 다나 역시 한참을 웃었다. 그래도 꼭 자기가 보내주겠다며, 한국어를 말하는 것에 굉장히 호기심을 가져주어서 참 고마웠다. 외국인 친구들과는 말이 통하기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통하는' 일이 생기면, 그게 크든 작든 참 재미있는 거 같다.
며칠 후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자 음악이 나오고,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와인을 마시고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키기도 했는데, 여기 한국말 아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열창했다. 춤은 포크댄스처럼 쉬워서 모두가 금방 익힐 수 있었다. 그래도 부끄러워서 살짝살짝 뒤로 빠지려 하는데, 사람들이 손을 확 잡아 끌어 빠질 수 없는 춤에 빠지고 말았다. 이 축제가 큰 규모라기보다는 지역 축제 혹은 잔치 같았는데, 환경 메세지를 가지고 있으니, 사람들이 일부러 와서도 관심을 가져주었다. 모두들 눈치 보지 않고 공연이나 춤에 익숙한 모습으로 즐기는 분위기가 좋았다. 다음 날은 어린 아이들이 많이 몰려왔다. 우리가 만든 정원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연극을 했다. 사실 잡초를 뽑고 돌을 옮기며 쓰레기를 치우면서도, 이것이 이러한 용도로 쓰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완성된 곳이 앨리스의 세계로 꾸며지고, 아이들의 눈이 반짝 반짝 빛나는 걸 보니 정말 뿌듯했다. 실감나게 연기를 하는 연극배우들에게 나도 빠져들어, ‘이상한 나라’에 온 듯 설렜다. 배우들은 정원 곳곳을 옮겨 다니면서 연기를 하고, 한 곳에서 연극이 끝나면 꼬마들이 졸졸 따라가는데, 그 풍경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워크캠프가 끝나기 하루 전 날, 오후에는 다같이 돌아가면서 익명의 롤링페이퍼를 썼다. 사람들이 내게 써준 단어들을 보니, 말을 많이 못 했어도 느낌이라는 게 통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원하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교적인 사람이 되진 못했지만, 어쩌면 이게 가장 나답게, 적응해나갔던 게 아닐까 싶다. 해가 질 무렵에는 다 같이 성에 올라 사진을 찍으러 갔다. 바로 직전에 마리나와 다나가 내 머리도 양갈래로 땋아 주어서, 외국에서밖에 할 수 없는 머리로 감히 사진을 찍으러 갔다. 내가 둘째날 찍었던 컨셉 사진을 보고는, 재밌어 보인다며 다 같이 따라 찍기도 했고, 때 아닌 막걸리나 춤이 번져 동영상을 찍기도 했다. 나의 첫 워크 캠프는 결과적으로 만족스럽다. 여기에 두 세 번씩 오는 친구들도 있어서, 나 역시 ‘첫’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