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케냐, 잊을 수 없는 경험과의 약속
MKAMATHI SECONDARY SCHOOL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정말 내 인생에서 정말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경험들 만들었다. 정말 너무나도 좋은 경험이었으면 후에 꼭 다시 참가하겠다고 내 자신에게 약속을 했다. 한국에 복귀한지 이제 한 달이 돼가지만 아직도 현지사람과 그리고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너무나 그립다. 이번 워크캠프로 인하여 내 자신에 대한 시각이 더욱 더 넓어졌으며, 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더욱더 한 폭 상승했다. 비록 현재 얼굴은 못 보지만 페이스북을 통하여 연락을 유지 하고 있으며 현지사람에게 언젠가는 가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처음 케냐에 출국을 하였을 때는 모든 것이 절망 그 자체였다. 케냐라는 국가에 대해 어느 정도 책으로 정보를 얻긴 했지만 막상 현지에 가보니 머릿속에 지우개라도 들어 온 듯 모든 것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역시 사람은 경험 한번 하는 것이 말 100번 듣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 경험보다 훌륭한 스승을 없는 것 같다.
원래는 같은 학교의 조원이랑 캠프 시작 전 일주일 전에 미리 와서 사파리 여행을 계획하였으나 황열병 주사의 부작용으로 인해 결국은 혼자 출국을 하고 말았다. 미리 짜 놓은 계획이 물거품이 된 상태에서 출국을 하니 머무를 곳은 호텔밖에 없었다. 대학전공이 영어라서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는 통할 줄 알았으나 나만의 착각이었다. 미국식 영어 공부를 하던 내 자신이 케냐 사람들의 영국식 발음에 혼란이 왔으며 액센트도 달라서 이해를 하지 못해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현지에 있으면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을 하게 되었다. 차츰 생활을 해가면서 사람들의 말하는 스타일이나 관습에 차츰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어영부영 호텔에서 3일 정도를 무의미 하게 보낸 후 픽업을 신청하였기 때문에 공항으로 다시 복귀하여 차를 타고 KVDA오피스에 도착을 하였다. 도착할 당시에는 일본인 2명과, 프랑스인 1명, 그리고 스페인 1명이 미리 도착해서 나를 반갑게 반겨주었다. 해외 경험이 처음인 나로써는 영어실력을 쌓기 위해 꾸준히 사람들과 교류를 하며 다른 나라의 문화와 관습과 사람들의 기질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서로 친해지려고 노력을 했다. 조원들이 다 모이고 보니 총 인원은 14명 이었다. 공용어는 당연히 영어였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용 할 수 있는 언어는 영어밖에 없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후 오피스에서 8시간을 거쳐 카카메카에 있는 문다하스쿨에 도착을 하였다. 그곳은 말 그대로 너무나도 개발이 안된 지역이었다. 전기는 당연히 없었으며 숙박은 교실을 빌려 매트를 깔고 침낭으로 해결했어야 했고, 물은 옹달샘에서 직접 날라 끓여먹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시골에 살아온 내 자신은 다소 낯설기는 했지만 그렇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루 만에 모든 것에 적응을 한 나는 평소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고자 사람들과 계속 부딪혀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캠프를 시작하기 전 현지 사람들이 준비한 환영식은 다소 성의는 고마웠지만 너무 오래 끌어 지루한 감이 있었다.
실제로 캠프는 2월 7일에 시작을 하였다. 캠프를 시작하기 전 식사는 현지에서 재료를 구입하여 식사당번을 정하여 매일매일 현지 음식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cultural night’라고 각 나라의 음식을 준비하는 날도 정하여 각각 팀원들에게 기대심을 안겨 주었다. 한국음식을 대접하는 날에는 환상 그 자체였다. 불고기 소스와 고추장을 가져가서 비빔밥과 불고기 요리를 해주었는데 모든 이들이 너무나도 맛있게 먹어줬으며 극찬을 해주었다. 첫날은 화장실 건설을 위한 벽돌 정리작업으로 시작을 하였다. 처음 시작하는 캠프라 몸풀기 식으로 간단한 작업부터 시작을 했지만 나름대로 내 자신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케냐는 뜨거운 해가 중천에 떠 있었기 때문에 날씨가 너무 더워 힘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봉사를 하러 온 것 이지 힘들다고 쉬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 다짐 했다. 며칠 동안의 벽돌작업을 마친 후 그 다음으로는 화장실 건설을 위한 땅을 팠다. 삽과 곶 괭이로 땅을 파보니 벽돌 나르기보다 더욱더 배로 힘들었다. 아마 땅파는 작업이 나에게 가장 힘들었던 작업이었다. 대부분의 작업은 화장실을 위한 벽돌 나르기, 땅파기와 정원수리를 위한 조그마한 땅을 팠다. 그리고 작업이 끝난 후 에는 학생들에게 영어나 과학 등등 과목을 가르쳤으면 가끔 ‘Home Visit’ 이라고 현지 팀원 집에 방문 하는 이벤트를 실시 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캠프파이어를 이벤트를 가졌다. 이벤트 동안에는 오늘 하루 느꼈던 점과 불만과 요구사항 등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가끔 식은 갈등은 있었지만 대화로 원만하게 풀어나가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대화 시간이 끝난 후 에는 각종게임을 하여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게임은 ‘마피아’ 였다. 정말 나는 문화차이와 성격차이로 친해지기 어려 울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나 친근해져 없으면 너무 허전할 정도의 수준까지 친해졌다. 더군다나 내 영어실력은 출국 하기전보다 상승하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휴일이라 팀원들과 빅토리아 호수와 카카메가 숲에 여행을 갔다. 여행 그 자체는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다. 비록 오랫동안 걸어 피곤하기는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호수에서는 신기한 새들과 하마들을 난생 처음 봤으며 카카메가 숲에서는 원숭이와 뱀과 다양한 풀과 나무를 구경 하였다.
캠프를 모두 마친 후에는 학생들과 현지사람들이 해단식을 준비 해주었는데 그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모든 학생들이 노래를 준비하여 우리 팀원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목걸이와 다양한 선물을 주었다.
정말 수도 지역에 사는 케냐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시골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너무나 순수하고 정도 많으며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더라도 마주 치면 인사를 주주 받는 것이 문다하 마을 사람들의 성품이다.
다음주제로 넘어가 현지 물가는 한국과 심할 정도로 너무나도 쌌다. 처음에는 내가 소지한 돈이 너무나도 모자를 줄 알았지만 결국은 돈이 남고 말았다. 우리나라 돈 1천원이면 케냐 돈으로 80실링 정도가 됐었다. 바나나 3개를 10실링을 주고 구입을 하였으니 물가가 얼마나 싼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망고는 하나에 7실링이니 우리나라 돈으로는 100원정도 할련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시골지역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케냐는 도시 지역과 시골지역의 빈부격차가 너무나도 심했다. 시내에서 레스토랑에 방문해서 식사 한번 하는데 거의 600실링을 사용하였다. 현지 팀원들도 케냐는 빈부격차가 심하다면서 불만을 토로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케냐에서 선생님이 되는 것은 모든 이가 꿈꾸는 직업이 아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을 받고 한달 동안 열심히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하는 모습에 나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학교에서는 수업이 케냐 사람들의 모국어인 ‘스와힐리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영어로 진행이 되었다. 나름대로 흥미가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경험을 글로 표현하자니 너무나도 제한을 받는 느낌이 든다.
이 정도로 마치는 것으로 하겠으며 100점중에 평가를 한다면 내 자신은 100점을 주고 싶다.
그만큼 너무나도 좋은 경험 이었으며 내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고 더군다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더 상승을 하여 다른 이들에게 강력히 추천을 하고 싶다.
처음 케냐에 출국을 하였을 때는 모든 것이 절망 그 자체였다. 케냐라는 국가에 대해 어느 정도 책으로 정보를 얻긴 했지만 막상 현지에 가보니 머릿속에 지우개라도 들어 온 듯 모든 것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역시 사람은 경험 한번 하는 것이 말 100번 듣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 경험보다 훌륭한 스승을 없는 것 같다.
원래는 같은 학교의 조원이랑 캠프 시작 전 일주일 전에 미리 와서 사파리 여행을 계획하였으나 황열병 주사의 부작용으로 인해 결국은 혼자 출국을 하고 말았다. 미리 짜 놓은 계획이 물거품이 된 상태에서 출국을 하니 머무를 곳은 호텔밖에 없었다. 대학전공이 영어라서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는 통할 줄 알았으나 나만의 착각이었다. 미국식 영어 공부를 하던 내 자신이 케냐 사람들의 영국식 발음에 혼란이 왔으며 액센트도 달라서 이해를 하지 못해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현지에 있으면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을 하게 되었다. 차츰 생활을 해가면서 사람들의 말하는 스타일이나 관습에 차츰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어영부영 호텔에서 3일 정도를 무의미 하게 보낸 후 픽업을 신청하였기 때문에 공항으로 다시 복귀하여 차를 타고 KVDA오피스에 도착을 하였다. 도착할 당시에는 일본인 2명과, 프랑스인 1명, 그리고 스페인 1명이 미리 도착해서 나를 반갑게 반겨주었다. 해외 경험이 처음인 나로써는 영어실력을 쌓기 위해 꾸준히 사람들과 교류를 하며 다른 나라의 문화와 관습과 사람들의 기질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서로 친해지려고 노력을 했다. 조원들이 다 모이고 보니 총 인원은 14명 이었다. 공용어는 당연히 영어였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용 할 수 있는 언어는 영어밖에 없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후 오피스에서 8시간을 거쳐 카카메카에 있는 문다하스쿨에 도착을 하였다. 그곳은 말 그대로 너무나도 개발이 안된 지역이었다. 전기는 당연히 없었으며 숙박은 교실을 빌려 매트를 깔고 침낭으로 해결했어야 했고, 물은 옹달샘에서 직접 날라 끓여먹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시골에 살아온 내 자신은 다소 낯설기는 했지만 그렇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루 만에 모든 것에 적응을 한 나는 평소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고자 사람들과 계속 부딪혀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캠프를 시작하기 전 현지 사람들이 준비한 환영식은 다소 성의는 고마웠지만 너무 오래 끌어 지루한 감이 있었다.
실제로 캠프는 2월 7일에 시작을 하였다. 캠프를 시작하기 전 식사는 현지에서 재료를 구입하여 식사당번을 정하여 매일매일 현지 음식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cultural night’라고 각 나라의 음식을 준비하는 날도 정하여 각각 팀원들에게 기대심을 안겨 주었다. 한국음식을 대접하는 날에는 환상 그 자체였다. 불고기 소스와 고추장을 가져가서 비빔밥과 불고기 요리를 해주었는데 모든 이들이 너무나도 맛있게 먹어줬으며 극찬을 해주었다. 첫날은 화장실 건설을 위한 벽돌 정리작업으로 시작을 하였다. 처음 시작하는 캠프라 몸풀기 식으로 간단한 작업부터 시작을 했지만 나름대로 내 자신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케냐는 뜨거운 해가 중천에 떠 있었기 때문에 날씨가 너무 더워 힘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봉사를 하러 온 것 이지 힘들다고 쉬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에게 다짐 했다. 며칠 동안의 벽돌작업을 마친 후 그 다음으로는 화장실 건설을 위한 땅을 팠다. 삽과 곶 괭이로 땅을 파보니 벽돌 나르기보다 더욱더 배로 힘들었다. 아마 땅파는 작업이 나에게 가장 힘들었던 작업이었다. 대부분의 작업은 화장실을 위한 벽돌 나르기, 땅파기와 정원수리를 위한 조그마한 땅을 팠다. 그리고 작업이 끝난 후 에는 학생들에게 영어나 과학 등등 과목을 가르쳤으면 가끔 ‘Home Visit’ 이라고 현지 팀원 집에 방문 하는 이벤트를 실시 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캠프파이어를 이벤트를 가졌다. 이벤트 동안에는 오늘 하루 느꼈던 점과 불만과 요구사항 등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가끔 식은 갈등은 있었지만 대화로 원만하게 풀어나가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대화 시간이 끝난 후 에는 각종게임을 하여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게임은 ‘마피아’ 였다. 정말 나는 문화차이와 성격차이로 친해지기 어려 울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나 친근해져 없으면 너무 허전할 정도의 수준까지 친해졌다. 더군다나 내 영어실력은 출국 하기전보다 상승하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휴일이라 팀원들과 빅토리아 호수와 카카메가 숲에 여행을 갔다. 여행 그 자체는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다. 비록 오랫동안 걸어 피곤하기는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호수에서는 신기한 새들과 하마들을 난생 처음 봤으며 카카메가 숲에서는 원숭이와 뱀과 다양한 풀과 나무를 구경 하였다.
캠프를 모두 마친 후에는 학생들과 현지사람들이 해단식을 준비 해주었는데 그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모든 학생들이 노래를 준비하여 우리 팀원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목걸이와 다양한 선물을 주었다.
정말 수도 지역에 사는 케냐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시골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너무나 순수하고 정도 많으며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더라도 마주 치면 인사를 주주 받는 것이 문다하 마을 사람들의 성품이다.
다음주제로 넘어가 현지 물가는 한국과 심할 정도로 너무나도 쌌다. 처음에는 내가 소지한 돈이 너무나도 모자를 줄 알았지만 결국은 돈이 남고 말았다. 우리나라 돈 1천원이면 케냐 돈으로 80실링 정도가 됐었다. 바나나 3개를 10실링을 주고 구입을 하였으니 물가가 얼마나 싼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망고는 하나에 7실링이니 우리나라 돈으로는 100원정도 할련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시골지역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케냐는 도시 지역과 시골지역의 빈부격차가 너무나도 심했다. 시내에서 레스토랑에 방문해서 식사 한번 하는데 거의 600실링을 사용하였다. 현지 팀원들도 케냐는 빈부격차가 심하다면서 불만을 토로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케냐에서 선생님이 되는 것은 모든 이가 꿈꾸는 직업이 아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을 받고 한달 동안 열심히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하는 모습에 나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학교에서는 수업이 케냐 사람들의 모국어인 ‘스와힐리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영어로 진행이 되었다. 나름대로 흥미가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경험을 글로 표현하자니 너무나도 제한을 받는 느낌이 든다.
이 정도로 마치는 것으로 하겠으며 100점중에 평가를 한다면 내 자신은 100점을 주고 싶다.
그만큼 너무나도 좋은 경험 이었으며 내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고 더군다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더 상승을 하여 다른 이들에게 강력히 추천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