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족자카르타, 유스호스텔 마니아의 워크캠프
Prambanan WHV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글로벌 워크캠프를 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외국인들과 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만 여행을 했을 때 싼 값 때문에 유스호스텔에서 묵은 적이 있다. 그런데 유스호스텔에서 묵으니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친해져 같이 놀러 다니며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그 이후로 나는 유스호스텔 마니아가 되었고 외국에 가면 항상 유스호스텔만 이용했다. 외국인들과 같이 생활하는 것의 장점은 그들의 오픈 마인드와 색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들과의 교류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특성들을 추출할 수 있게 되고 그런 마인드와 가치관을 외국인들에게서 뽑아내어 내 고유의 성격을 창출해낼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캐릭터는 한국인들만 상대해온 사람들과는 차별성을 지니며 그들에게 신기하게 보이기도 한다. 나는 아예 외국에서 외국인들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는 프로그램인 워크캠프에 지원할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세계문화유산을 보호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자원봉사단은 어렸을 때 고고학자의 꿈을 가져본 적이 있는 나를 움직이기에 좋은 유인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나라를 지원할지 고민하게 되었는데 서구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는 유럽에 지원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만날 유럽만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유럽 제일주의의 편협한 사고방식에 갇히게 될 것 같았다. 때마침 인도네시아 국제학교를 나온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에게 인도네시아 생활에 대해서 들었다. 그리고 동남아에서 거대 기업을 일군 기업가의 강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왠지 나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인도네시아와 같은 동남아에서 사업을 하려면 일단 그 나라에서 생활해보고 필요한 게 무엇인지 연구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본 결과 인도네시아에 가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판단했다. 인도네시아 프람바난 프로젝트에는 고고학자도 만날 수 있다고 인터넷 사이트에 적혀있었다. 몽골 역사에 대해 박사학위를 가진 영국인과 밤새도록 몽골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무척 신나는 일이었다. 프람바난 프로젝트에서도 고고학자과 그런 깊은 대화를 나눌 환상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프람바난 사원 보호 프로젝트에 지원하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을 거의 전무했다. 유럽과 미국, 중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에 대한 나의 지식은 보잘 것 없었다. 내가 가는 족자카르타라는 도시도 이번 워크캠프 때 처음 들어보았을 정도였다. 캠프 팀원들은 일찍 출발했다. 아마도 비행기표 값이 싼 날짜를 찾다가 그랬던 것 같다. 기말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됐고, 시험 끝난 뒤 바로 프레젠테이션 공모전에 출전하느라 제대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전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공항에 내렸을 때 당황스러웠던 것은 여기에는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하철은 아예 없는 것 같았고 버스도 쉽게 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택시를 이용해서 다녀야만 했다. 그것도 공항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를 이용했는데 바가지 요금을 뜯길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워크캠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족자카르타를 여행했다. 인도는 우리나라보다 매우 작았고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인도에 사람들이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았다. 인도는 그냥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전부 다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녀서 인도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스쿠터는 물론 없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듯 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차량을 제공하겠다, 놀 곳을 알려주겠다 등등으로 말이다. 물론 도움에 대한 대가는 지불해야 했고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돈벌이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제공하는 도움을 받고 돈을 지불하는 건 딱히 불만이 없었다. 걱정되는 것은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낯선 땅에서 길 잃은 어린양과 같은 우리들은 범죄를 계획하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매우 손쉬운 먹잇감임에 분명했기 때문에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이들을 차단해야 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족자카르타 여행 동안 불미스러운 일을 겪지는 않았다. 우리를 안내하며 서비스를 제공한 인도네시아인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음이 마지막에 밝혀졌다. 그 사람 덕분에 편하게 족자카르타 투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족자카르타의 궁전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휘황찬란함을 지닌 유럽 궁전에 비해서 소박, 검소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밖에 동물원, 번화가, 빠랑뜨리 해변, 당구장에 가보았다.
워크캠프가 시작하는 날이 왔다. 차를 타고 문명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아주 외딴 시골에 떨어졌다. 내가 상상했던 곳보다는 괜찮았다. 나는 정글에서 일을 하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오랑우탄이나 표범도 종종 볼 수 있을만한 장소일 줄 알았다. 사는 곳도 초가집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곳은 초가집이나 정글보다는 여건이 괜찮은 편이었다. 한국인 10명과 인도네시아인 4명이 참여했다. 캠프 참가자들의 국적이 다양할 줄 알았는데 2개뿐 이었다. 게다가 한국인이 훨씬 많았다. 봉사활동 내용은 돌을 빗자루로 긁고 쓸어 내리는 무척 멋진 일이었다. 실제로 멋지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할 때는 계속 멋진 일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솔직히 신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루한 건 둘째치고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업에 있어서 정체성이나 기술 다양성을 찾을 수 없었다. 머무는 곳은 인도네시아 시골 가정집이었다. 거기에 참가자 14명과 그 집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공존했다. 워크캠프가 시작되고 난 뒤의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오전에 일을 하고 돌아와 낮잠을 잤다. 회의를 하거나 인도네시아 어린이용 악기를 연주하는 소소한 프로그램이 있기도 했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캠프 참가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했다. 이야깃거리는 얼마 안가 바닥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간단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읽을 책 한 권이라도 가져왔을 걸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워크캠프 참가자들에게 유일하게 활력을 불어넣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골에서 살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었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마들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매일 출근하듯이 몰려오고는 했다. 축구나 공기로 소일하던 그들에게 우리들은 엄청난 신세계로 다가왔을 것이다. 대부분의 워크캠프 참가자들은 어린아이들과 노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던 것 같다. 나도 꼬마들이랑 놀아보려 시도했는데 이미 문명과 세속에 물들어버린 나와, 나름 순수함을 간직한 꼬마들과의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꼬마들과 놀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의 시선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안됐다. 내가 경쟁사회에 익숙해져 동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귀여운 꼬마들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꼬마들이 공부를 안하고 만날 너무 노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꼬마들과 캠프 참가자들이 노는 것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았다.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자연에 최대한 가까운 인간일 것이다. 명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나와 세속에 물든 서울의 내 주변인들을 실험군으로 하자면, 거의 완벽하게 자연상태로 보존된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대조군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몇 가설을 설정하였고 관찰과 간단한 실험을 통해 나의 가설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박물학자 다윈처럼 문명과는 동떨어진 이곳에서 소기의 연구 성과를 낸 것이다. 이런 걸 작은 즐거움으로 삼았다.
참가자들은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나름대로의 놀이 문화를 만들었다. 루미큐브를 하거나 우노를 했다. 꼬마들이 있을 때는 꼬마들과 놀았다. 남는 시간을 해결할 대상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지역사회에 문화전파를 하는 일환으로 한국인들은 쇼를 기획해야 했다. 형식적으로 때우는 게 아니라 한국 캠퍼들은 매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는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 붓기로 작정 한 듯 다들 엄청난 열정을 보여주었다. 공연은 인도네시아어로 하는 연극, 태권도, k-pop춤, 동요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공연을 지역사회 주민들 앞에서 캠프가 끝날 때쯤 선보일 계획이었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했던 프라우산 사원에 대한 감상을 해보겠다. 프라우산은 프람바난 사원의 일부였다. 지진이 나서 무너진 것을 다시 재건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대한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이 사원은 뭔가 음산하면서도 무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뭔가 무속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거대한 돌무더기들은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의 미적 기준에 의해서 따져보자면 그리하였다. 세월의 무상함만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일요일 자유시간에 간 곳은 보로부두르 사원이었다. 세계사를 배우면서 사진으로 한 번 본 곳이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불교 건축물이었다. 나름대로 불교 철학을 가지고 공을 들여 만든 건물이었다. 가이드를 대동하고 갔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돌 하나 하나에 다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들었지만 돌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의미들이 있는 나머지 돌 이야기에는 관심을 거두고 멋진 사진 찍는 데에 전념했다. 요약하자면 한 층씩 올라갈수록 천국에 다다른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주에는 우리들이 준비했던 공연이 있었다. 그걸 하고 나니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보였던 워크캠프도 마침내 그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캠퍼들은 카드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금 우정을 확인했으며 캠프가 끝나자 인도네시아인 참가자들과 한국인 참가자들은 작별을 했다. 한국인 참가자들은 캠프가 끝나고 인도네시아를 좀 더 여행했다.
인도네시아 참가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상당히 괜찮은 사람들로 구성돼있었다. 한국인들에 비해 순수했다. 선입견이 아니라 확실히 진짜였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그들이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내는 장면은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본모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단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한국의 내 또래와 비교해서 생각해 봤을 때 착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좀 나쁜 것이 미덕이고 그게 당연시 되던 사회에서 살다가 그런 친구들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홈스테이 주민들까지 포함해서 되돌아보면 그들은 꽤 좋은 사람들로 기억된다. 한국 참가자들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보통 대외활동을 팀으로 하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런 게 눈에 띄게 일어나지 않았다. 함께 지내면서 캠프 참가자들에게서 배울 점도 있었다. 여러 대외활동을 해본 경험에서 비추어봤을 때 이번 캠프는 상당히 잘 이루어졌다.
이번 워크캠프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한국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봉사활동도 단순해서 의미가 있다고 보이진 않았다. 기대했던 고고학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생활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발전할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는 점에서 완전히 낭비한 시간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캠프 때 위험한 적이 많았다. 인도, 신호등, 횡단보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량이동을 할 때 운전자가 유턴을 하거나 역주행을 할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생명에 위협을 느꼈으며 나의 짧은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특히 길을 건널 때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아찔했던 그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든 캠프참가자들이 안전하게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을 거의 전무했다. 유럽과 미국, 중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에 대한 나의 지식은 보잘 것 없었다. 내가 가는 족자카르타라는 도시도 이번 워크캠프 때 처음 들어보았을 정도였다. 캠프 팀원들은 일찍 출발했다. 아마도 비행기표 값이 싼 날짜를 찾다가 그랬던 것 같다. 기말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됐고, 시험 끝난 뒤 바로 프레젠테이션 공모전에 출전하느라 제대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전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공항에 내렸을 때 당황스러웠던 것은 여기에는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하철은 아예 없는 것 같았고 버스도 쉽게 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택시를 이용해서 다녀야만 했다. 그것도 공항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를 이용했는데 바가지 요금을 뜯길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워크캠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족자카르타를 여행했다. 인도는 우리나라보다 매우 작았고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인도에 사람들이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았다. 인도는 그냥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전부 다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녀서 인도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스쿠터는 물론 없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듯 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차량을 제공하겠다, 놀 곳을 알려주겠다 등등으로 말이다. 물론 도움에 대한 대가는 지불해야 했고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돈벌이로 삼는 사람들이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제공하는 도움을 받고 돈을 지불하는 건 딱히 불만이 없었다. 걱정되는 것은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낯선 땅에서 길 잃은 어린양과 같은 우리들은 범죄를 계획하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매우 손쉬운 먹잇감임에 분명했기 때문에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이들을 차단해야 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족자카르타 여행 동안 불미스러운 일을 겪지는 않았다. 우리를 안내하며 서비스를 제공한 인도네시아인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음이 마지막에 밝혀졌다. 그 사람 덕분에 편하게 족자카르타 투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족자카르타의 궁전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휘황찬란함을 지닌 유럽 궁전에 비해서 소박, 검소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밖에 동물원, 번화가, 빠랑뜨리 해변, 당구장에 가보았다.
워크캠프가 시작하는 날이 왔다. 차를 타고 문명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아주 외딴 시골에 떨어졌다. 내가 상상했던 곳보다는 괜찮았다. 나는 정글에서 일을 하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오랑우탄이나 표범도 종종 볼 수 있을만한 장소일 줄 알았다. 사는 곳도 초가집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곳은 초가집이나 정글보다는 여건이 괜찮은 편이었다. 한국인 10명과 인도네시아인 4명이 참여했다. 캠프 참가자들의 국적이 다양할 줄 알았는데 2개뿐 이었다. 게다가 한국인이 훨씬 많았다. 봉사활동 내용은 돌을 빗자루로 긁고 쓸어 내리는 무척 멋진 일이었다. 실제로 멋지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할 때는 계속 멋진 일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솔직히 신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루한 건 둘째치고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업에 있어서 정체성이나 기술 다양성을 찾을 수 없었다. 머무는 곳은 인도네시아 시골 가정집이었다. 거기에 참가자 14명과 그 집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공존했다. 워크캠프가 시작되고 난 뒤의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오전에 일을 하고 돌아와 낮잠을 잤다. 회의를 하거나 인도네시아 어린이용 악기를 연주하는 소소한 프로그램이 있기도 했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캠프 참가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했다. 이야깃거리는 얼마 안가 바닥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간단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읽을 책 한 권이라도 가져왔을 걸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워크캠프 참가자들에게 유일하게 활력을 불어넣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골에서 살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었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마들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매일 출근하듯이 몰려오고는 했다. 축구나 공기로 소일하던 그들에게 우리들은 엄청난 신세계로 다가왔을 것이다. 대부분의 워크캠프 참가자들은 어린아이들과 노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던 것 같다. 나도 꼬마들이랑 놀아보려 시도했는데 이미 문명과 세속에 물들어버린 나와, 나름 순수함을 간직한 꼬마들과의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꼬마들과 놀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의 시선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안됐다. 내가 경쟁사회에 익숙해져 동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귀여운 꼬마들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꼬마들이 공부를 안하고 만날 너무 노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꼬마들과 캠프 참가자들이 노는 것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았다.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자연에 최대한 가까운 인간일 것이다. 명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나와 세속에 물든 서울의 내 주변인들을 실험군으로 하자면, 거의 완벽하게 자연상태로 보존된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은 대조군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몇 가설을 설정하였고 관찰과 간단한 실험을 통해 나의 가설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박물학자 다윈처럼 문명과는 동떨어진 이곳에서 소기의 연구 성과를 낸 것이다. 이런 걸 작은 즐거움으로 삼았다.
참가자들은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나름대로의 놀이 문화를 만들었다. 루미큐브를 하거나 우노를 했다. 꼬마들이 있을 때는 꼬마들과 놀았다. 남는 시간을 해결할 대상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지역사회에 문화전파를 하는 일환으로 한국인들은 쇼를 기획해야 했다. 형식적으로 때우는 게 아니라 한국 캠퍼들은 매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는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 붓기로 작정 한 듯 다들 엄청난 열정을 보여주었다. 공연은 인도네시아어로 하는 연극, 태권도, k-pop춤, 동요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공연을 지역사회 주민들 앞에서 캠프가 끝날 때쯤 선보일 계획이었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했던 프라우산 사원에 대한 감상을 해보겠다. 프라우산은 프람바난 사원의 일부였다. 지진이 나서 무너진 것을 다시 재건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대한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이 사원은 뭔가 음산하면서도 무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뭔가 무속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거대한 돌무더기들은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의 미적 기준에 의해서 따져보자면 그리하였다. 세월의 무상함만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일요일 자유시간에 간 곳은 보로부두르 사원이었다. 세계사를 배우면서 사진으로 한 번 본 곳이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불교 건축물이었다. 나름대로 불교 철학을 가지고 공을 들여 만든 건물이었다. 가이드를 대동하고 갔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돌 하나 하나에 다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들었지만 돌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의미들이 있는 나머지 돌 이야기에는 관심을 거두고 멋진 사진 찍는 데에 전념했다. 요약하자면 한 층씩 올라갈수록 천국에 다다른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주에는 우리들이 준비했던 공연이 있었다. 그걸 하고 나니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보였던 워크캠프도 마침내 그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캠퍼들은 카드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금 우정을 확인했으며 캠프가 끝나자 인도네시아인 참가자들과 한국인 참가자들은 작별을 했다. 한국인 참가자들은 캠프가 끝나고 인도네시아를 좀 더 여행했다.
인도네시아 참가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상당히 괜찮은 사람들로 구성돼있었다. 한국인들에 비해 순수했다. 선입견이 아니라 확실히 진짜였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그들이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내는 장면은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본모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단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한국의 내 또래와 비교해서 생각해 봤을 때 착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좀 나쁜 것이 미덕이고 그게 당연시 되던 사회에서 살다가 그런 친구들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홈스테이 주민들까지 포함해서 되돌아보면 그들은 꽤 좋은 사람들로 기억된다. 한국 참가자들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보통 대외활동을 팀으로 하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런 게 눈에 띄게 일어나지 않았다. 함께 지내면서 캠프 참가자들에게서 배울 점도 있었다. 여러 대외활동을 해본 경험에서 비추어봤을 때 이번 캠프는 상당히 잘 이루어졌다.
이번 워크캠프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한국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봉사활동도 단순해서 의미가 있다고 보이진 않았다. 기대했던 고고학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생활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발전할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는 점에서 완전히 낭비한 시간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캠프 때 위험한 적이 많았다. 인도, 신호등, 횡단보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량이동을 할 때 운전자가 유턴을 하거나 역주행을 할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생명에 위협을 느꼈으며 나의 짧은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특히 길을 건널 때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아찔했던 그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든 캠프참가자들이 안전하게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