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하노이, 열한 명의 친구들과 비장한 각오
THUY AN CENTER FOR ORPHANS AND DISABLED CHILDREN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항공편으로 인해 미팅타임에 2시간 정도 늦은 나는 부랴부랴 미팅 포인트인 사무실에 도착했다. 로컬 봉사자인 륭을 제외한 다른 봉사자들은 하노이 시내 구경에 나갔고 나는 륭과 영어로 다양한 문화를 교류 하며 1일차를 맞이했다. Sjv Vietnam은 한 사무실에서 2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고 숙소도 같이 사용을 했다. 륭은 나에게 친절하게 봉사 시스템과 다른 나라 참가자 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내가 참가한 프로젝트에는 한국인 2명 (나를 포함한) 스페인 3명, 미국인 1명, 프랑스인 3명, 베트남인 2명 이렇게 총 11명이 참가 했다고 했다. 기대되는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렸고 곧이어 그들이 왔다. 통성명을 하고 저녁을 먹으며 봉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다들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봉사에 임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다시 사무실(숙소)로 돌아오니 다른 프로젝트 아이들 (한국인 2명을 포함) 도 와 있었다. 우리 한국인은 타국에서 급속도로 친해지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들었다.
출발은 좋았으나 내가 속한 프로젝트에는 여러 문제점이 정말 많았다. 우리는 모두 봉사를 하루 빨리 하고 싶어 하길 원했지만 병원 측과 얘기가 덜되어 6일이 지난 후부터 봉사를 하게 되었다. 또 인포싯에 없는 내용. 플래쉬 몹 이라던지 참관 수업 등 시간을 허비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러 아이들이 수 차례 이의를 제기 했지만 베트남 아이들은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했었고 (우리나라는 원래 이래. 이해해 너네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잖아.) 결국 한국인 1명이 봉사를 할 수 있게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나가고 나서야 정상적인 봉사가 이루어졌다.
어쨌든 지금은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다. 봉사를 한 것 그 자체에 큰 의의를 두고 싶다.
봉사를 제대로 시작한 날로부터 우리는 약 일주일 동안 오전에는 정신지체 센터, 오후에는 소아 병동에서 일을 했다.
정신 지체센터는 시내의 외각 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작은 센터 였고 2~30명 정도가 지내고 있었다. 사방은 바나나나무와 기타 다른 식물들이 살고 있는 넓은 풀숲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상상 그 이상의 열악한 시설과 최악의 환경이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센터 대부분이 20세 이하의 아이들이었다. 장애인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널브러져있었고 실내는 내 방만한 작은 크기의 공간에, 돌 바닥에 깔린 장판 반이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장판 때문에 돌 가루가 흩날렸으며 장판이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며, 인형에는 한 번도 닦거나 빨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이 들만큼 검은 때가 빽빽하게 껴있었다. 그야말로 멘붕 이다.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못할 일을 또 한 번 목격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장애 센터 라는 곳에서 봉사 경험이 거의 없던 나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거나 침을 흘리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먼저 다가가기가 사실은 부담스러웠다. 시끄러운 소리에 더러운 사물들. 처음 보는 풍경과 낯선 환경에 넋을 놓고 한참을 가만히 서서 적응을 하려 노력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아이는 날 꼭 껴안아주고 장난을 치며 긴장을 풀어줬다. 그리고 나에게 공을 던지고 내 눈치를 보며 모른 척 하고 있는 장애인 아저씨. 언제나 띄고 있는 미소와 웃음소리가 인상적이었는데 참 선하고 착해 보였다. 30대 후반 정도 되는 나이였으나 정신연령은 10살 정도라고 한다. 그런 사실이 안타까울 새도 없이 난 장애인들과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장애인들은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그 뒤 일주일 동안 봉사를 하며 사랑과 행복을 느꼈다. 내가 한 것이라곤 그들에게 미소를 띄고 팔 다리를 주물러 주고 밥을 먹여준 것뿐 인데 그들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봉사를 마친 뒤 점심을 먹고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소아병동으로 간다.
소아병동을 둘러본 결과 이정도 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현실은 훨씬 더 참혹했다. 일단 여름 평균 온도가 35도인 나라에 모든 병동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한 나라 수도 안의 가장 크다는 병원 건물이 오래되어 많이 낡아 있었고 5~7평정도 되는 방안에 약 4개에서 7개의 침대가 있는데 당연히 보호자 침대는 없을뿐더러 한 개의 침대를 무려 어린이 3명이 같이 쓴다고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경우에서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이곳의 현실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카락이 없었다. 우리가 생각 하는 것 보다 많이 아픈 아이들이라고 했다. 머리카락이 없을 정도면 보기보다 심각한 병이라는 것을 난 왜 몰랐을까. 가슴이 너무 아팠다.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이곳 아이들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지체센터 아이들에 비해 소극적이고 한없이 연약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똑똑했다. 봉사를 하는 것이 힘들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날보고 활짝 웃어 줄 때면 그 동안 쌓인 피로가 날아갔다. 껴안고 뽀뽀 해주는 게 이제 이곳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 많이 그리웠을 지체센터와 소아 병동 아이들. 나는 진심으로 봉사에 임했고 마지막 날에는 기약 없는 만남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다시 이곳에 와 육체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인 도움까지 줄 것이라고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 다른 나라 친구들과도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져 자신들의 나라로 놀러 오면 숙소와 음식 그리고 가이드까지 제공 해주겠다고 꼭 놀러 올 것을 당부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첫날부터 제대로 봉사활동을 했었으면 정말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을 것 같지만 이번 워크캠프를 통해 배운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만족한다. 지금은 나에게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던 영어를 더 열심히 배우고 있고 한 달에 한번씩 봉사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거부감이 진작에 사라진 것은 물론 오히려 먼저 다가가게 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 이었다.
다시 사무실(숙소)로 돌아오니 다른 프로젝트 아이들 (한국인 2명을 포함) 도 와 있었다. 우리 한국인은 타국에서 급속도로 친해지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들었다.
출발은 좋았으나 내가 속한 프로젝트에는 여러 문제점이 정말 많았다. 우리는 모두 봉사를 하루 빨리 하고 싶어 하길 원했지만 병원 측과 얘기가 덜되어 6일이 지난 후부터 봉사를 하게 되었다. 또 인포싯에 없는 내용. 플래쉬 몹 이라던지 참관 수업 등 시간을 허비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러 아이들이 수 차례 이의를 제기 했지만 베트남 아이들은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했었고 (우리나라는 원래 이래. 이해해 너네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잖아.) 결국 한국인 1명이 봉사를 할 수 있게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나가고 나서야 정상적인 봉사가 이루어졌다.
어쨌든 지금은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다. 봉사를 한 것 그 자체에 큰 의의를 두고 싶다.
봉사를 제대로 시작한 날로부터 우리는 약 일주일 동안 오전에는 정신지체 센터, 오후에는 소아 병동에서 일을 했다.
정신 지체센터는 시내의 외각 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작은 센터 였고 2~30명 정도가 지내고 있었다. 사방은 바나나나무와 기타 다른 식물들이 살고 있는 넓은 풀숲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상상 그 이상의 열악한 시설과 최악의 환경이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센터 대부분이 20세 이하의 아이들이었다. 장애인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널브러져있었고 실내는 내 방만한 작은 크기의 공간에, 돌 바닥에 깔린 장판 반이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장판 때문에 돌 가루가 흩날렸으며 장판이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며, 인형에는 한 번도 닦거나 빨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이 들만큼 검은 때가 빽빽하게 껴있었다. 그야말로 멘붕 이다.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못할 일을 또 한 번 목격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장애 센터 라는 곳에서 봉사 경험이 거의 없던 나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거나 침을 흘리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먼저 다가가기가 사실은 부담스러웠다. 시끄러운 소리에 더러운 사물들. 처음 보는 풍경과 낯선 환경에 넋을 놓고 한참을 가만히 서서 적응을 하려 노력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아이는 날 꼭 껴안아주고 장난을 치며 긴장을 풀어줬다. 그리고 나에게 공을 던지고 내 눈치를 보며 모른 척 하고 있는 장애인 아저씨. 언제나 띄고 있는 미소와 웃음소리가 인상적이었는데 참 선하고 착해 보였다. 30대 후반 정도 되는 나이였으나 정신연령은 10살 정도라고 한다. 그런 사실이 안타까울 새도 없이 난 장애인들과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장애인들은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그 뒤 일주일 동안 봉사를 하며 사랑과 행복을 느꼈다. 내가 한 것이라곤 그들에게 미소를 띄고 팔 다리를 주물러 주고 밥을 먹여준 것뿐 인데 그들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봉사를 마친 뒤 점심을 먹고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소아병동으로 간다.
소아병동을 둘러본 결과 이정도 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현실은 훨씬 더 참혹했다. 일단 여름 평균 온도가 35도인 나라에 모든 병동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한 나라 수도 안의 가장 크다는 병원 건물이 오래되어 많이 낡아 있었고 5~7평정도 되는 방안에 약 4개에서 7개의 침대가 있는데 당연히 보호자 침대는 없을뿐더러 한 개의 침대를 무려 어린이 3명이 같이 쓴다고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경우에서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이곳의 현실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카락이 없었다. 우리가 생각 하는 것 보다 많이 아픈 아이들이라고 했다. 머리카락이 없을 정도면 보기보다 심각한 병이라는 것을 난 왜 몰랐을까. 가슴이 너무 아팠다.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이곳 아이들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지체센터 아이들에 비해 소극적이고 한없이 연약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똑똑했다. 봉사를 하는 것이 힘들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날보고 활짝 웃어 줄 때면 그 동안 쌓인 피로가 날아갔다. 껴안고 뽀뽀 해주는 게 이제 이곳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 많이 그리웠을 지체센터와 소아 병동 아이들. 나는 진심으로 봉사에 임했고 마지막 날에는 기약 없는 만남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다시 이곳에 와 육체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인 도움까지 줄 것이라고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 다른 나라 친구들과도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져 자신들의 나라로 놀러 오면 숙소와 음식 그리고 가이드까지 제공 해주겠다고 꼭 놀러 올 것을 당부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첫날부터 제대로 봉사활동을 했었으면 정말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을 것 같지만 이번 워크캠프를 통해 배운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만족한다. 지금은 나에게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던 영어를 더 열심히 배우고 있고 한 달에 한번씩 봉사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거부감이 진작에 사라진 것은 물론 오히려 먼저 다가가게 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