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후기
설렘과 두려움, 20시간의 첫 유럽
AVANCA 2012
참가 전 준비와 마음가짐
이번 워크캠프는 나의 첫 유럽 방문이라 비행기를 탈 때부터 많이 설레고 떨렸다. 짐을 쌀 때 까지는 담담했지만 막상 공항버스를 타니 그 때부터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인천->방콕->비엔나->바르셀로나->그라나다의 20시간 가까운 길고 긴 비행과, 환승 과정에서 영어를 실제로 사용해본 경험은 긴장을 완화시켜주기에 충분했다. 회화 경험이 거의 없어 언어장벽 문제로 고민했었는데, 면세점과 인포메이션 센터, 또는 옆 좌석 외국인 승객과 영어로 대화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후 1주일 정도 여행을 한 뒤 그라나다에서 리스본으로 저가항공을 이용하여 이동하였고, 이 곳에서 아반카까지는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사실 포르투 공항에서 아반카까지는 20분이면 가는데, 인포싯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리스본 공항으로 가는 표를 산 것이 실책이었다. 그래도 리스본에서 아반카까지 가면서 리스본 지하철역과 도시 간 기차역의 각기 다른 컨셉의 예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었고, 현지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긴 여정 끝에 Avanca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하여 캠프 관계자에게 전화를 하니 Eunice(약 30세)라는 포르투갈 현지인이 픽업하러 왔다. 우리는 볼을 맞대는 인사를 하고 우리 캠프의 숙소인 근처 초등학교로 이동했다. 캠프의 테마는 수 백 명 정도의 관객이 오는 단편 영화제 축제인 AVANCA2012를 위한 것으로, 숙소에서 10분정도 거리에 있는 강당을 관람관으로, 학교의 강당과 교실들을 워크샵 룸으로 사용했다. 나는 여행일정 때문에 하루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캠프에는 13명 가량의 사람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Eunice는 나를 그들에게 소개시켜주고, 숙소에 짐을 풀게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밖에 나오니 일이 끝난 다른 캠퍼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어 자기소개를 주고받았다. 이 캠프에서는 동양인이 나 하나 뿐이라 주목 받는 느낌이었다. 다들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예전에 쓰던 외국 이름인 Tony를 사용했고, 나 역시 그들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과 외우는 것이 꽤 힘들었다. 물론 이틀 정도 지나니 이름을 다 외우긴 했지만.. 자기소개가 끝난 뒤 이탈리아에서 온 Eugenio가 축구를 하자고 했는데, 축구를 잘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부담스러워 거절했지만 못 해도 상관없다고 격려해주어서 함께 축구를 했다. 축구를 하는 도중에 내가 공을 차자 공이 터져버리는 불상사가 있었는데, 독일에서 온 Benyamin이 공을 두고 “It was Chinese ball”이라고 말한 것을 내가 “It was Chinese boy”라고 들어서 “Hey, I’m not Chinese! I’m Korean!!”이라고 펄펄 뛰자 내가 오해한 것을 다들 눈치채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건 때문에 2주 내내 아이들이 날 Chinese Boy라고 놀리긴 했지만 재미있는 일과였다. 처음 4일에는 일을 거의 하지 않고 놀러만 다녔다. 우리의 유일한 일은 돌아가며 식사당번을 하는 것인데, 말이 식사당번이지 그냥 씨리얼과 우유, 빵, 치즈, 햄과 음료수 세팅, 물과 우유 끓이기, 설거지 등의 간단한 일이었다. 우리의 기상시간은 9시였고, 식사당번은 그보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다. 키친은 언제나 열려있었기 때문에 늦잠을 자서 아침시간을 놓쳐도 아무 때나 씨리얼과 빵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보통 숙소에서 빈둥거리다가 다른 도시로 관광을 가거나 바닷가에 놀러가곤 했다. 점심과 저녁은 늘 근처 레스토랑 3~4곳을 돌려가며 방문했고 메뉴는 언제나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생선 중 택1이었다. 덕분에 돌아올 때 몸무게가 좀 불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 중 하나는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남자는 무조건 팬츠만, 여자는 비키니를 입는다는 것이었다. 한국사람들은 보통 부끄러워서 수영할 때 위에 셔츠를 입지 않던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셔츠를 입고 들어갔더니 아이들이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벗고 들어가라고 하여 벗고 들어가보았더니 춥지도 않고 좋았다. 물론 그날 이후로 감기에 걸리긴 했지만, 즐거운 물놀이였다. 포르투갈의 클럽도 갔었는데, 한국과 다르게 사람들이 활동적이지 않아서 조금 실망했다. 우리 캠퍼들만 춤을 추는 분위기였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신나게 춤을 추다가 돌아왔다. 축제 날짜가 다가오면서 슬슬 우리도 일을 하기 시작했다. 포스터에 철사를 꿰어 Avanca 도로 곳곳에 매달아두는 일, 워크샵 용으로 쓸 교실들의 책상과 의자를 재배열하고 바닥을 닦는 일, 강당에 조명을 설치하고 장비들을 세팅하는 일 등이 우리의 주요 업무였다. 조명을 설치할 때는 캠퍼 중 최고령자인 한국나이로 30살의 프랑스인 Gauthier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나이에서 우러나오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일을 지도했고, 우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해냈다. 이런저런 준비를 다 마치고 우리는 포르투로 여행을 갔다. 포르투는 항구도시로 아름다운 강과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포르투 와인 박물관도 방문하고, 기념품도 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날은 우리끼리 저녁을 먹었는데, 포르투갈 전통 음식이라는 ‘francesinha’를 먹었다. 이는 빵과 빵 사이에 소시지와 고기를 넣고 치즈를 듬뿍 얹은 뒤 소스를 뿌려 먹는 음식으로 꽤 맛있었다. 시간은 흘러 Avanca Festival이 개막했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우리는 식사 시간 마다 정말 쉴 새 없이 그릇을 씻고 닦아야 했다. 우리는 자원봉사자인 동시에 축제의 일원이므로 워크샵에 하나씩 참가할 수 있었다. 나는 Road Movie 워크샵에 참가해서 나와 가장 친했던 캠퍼 중 한명인 스패니쉬 Mario와 공동주연으로 8시간정도 촬영에 임했다. 하지만 우리의 감독과 카메라감독, 음향감독 간에 불화가 생겨 감독이 쫓겨나고 우리가 찍은 필름은 무효화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결국은 감독을 희화화하면서 비난하는 내용의 모큐멘터리로 대체되었고, 이 사건은 내가 캠프에 지내면서 가장 불쾌했던 일 중 하나이다. 축제가 끝나가면서 우리는 조금 더 큰 바닷가로 갔고, 그 곳의 파도는 정말 강력한데다가 주기가 빨라서 한 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대서양에서 바로 오는 파도라서 그런지 정말 깜짝 놀랐다. 나중에는 우리가 짐을 놓은 곳까지 파도가 밀려와서 위로 조금씩 올라가는데도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짐이 젖고야 말았다. Avanca Festival은 마지막 날 성대한 뷔페 만찬으로 끝을 맺었고, 우리는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서운함의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남은 날들을 보냈다. 남은 날 동안 우리는 숙소에서 클럽음악을 틀어놓고 댄스파티를 벌이기도 하고, 미니게임 같은 것들을 제안하면서 하기도 하고, 축구, 탁구, 배드민턴 등의 활동을 하며 보냈다. 캠프 보스였던 George는 우리를 위해 샹그리아를 가끔 만들어주었고, 이를 마시고 취해서 일찍 잠에 들었던 기억도 난다. 우여곡절끝에 마지막날이 왔고, 나는 친한 캠퍼들과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하다가 6시 새벽 기차를 타고 캠프를 떠났다. 유쾌하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프렌치 바람둥이 Paul, 술을 마시면 조금 장난이 심해지지만 평소에는 착하고 친절한 프렌치 Gauthier, 짓궂고 활동적이지만 내면은 누구보다 따뜻했던 러시안 Nastya와 수줍음 많은 조그마한 소녀같았던 Katya, 바이킹의 후손답게 강인했지만 역시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고 한국 문화의 팬이라 네이버 웹툰까지 챙겨본다는 에스토니안 Kadri, 웬만한 남자보다 운동을 더 잘했던 터키쉬 Cagla와 개방적인 무슬림 Gockem, 정말 영화배우와 같은 연기력과 천의 얼굴을 가진 나의 절친 Eugenio, 영어를 잘 못했지만 적극적이고 배려심 많고 유쾌헀던 스패니쉬 Mario, 정말 미친 사람처럼 잘 놀았던 폴투기스 Mario, 모델 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털털하고 유쾌했던 스패니쉬 Montse, 정말 개방적이고 재밌었던 체코의 테레지, 노는 느낌이 물씬 났던 세르비아의 마리나와 예쁜 얼굴과 다르게 개그감이 충만한 이바나 등 소중한 친구들과의 추억은 언제까지나 기억할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떠나는 날은 정말 슬펐고, 기차에 타자마자 그리웠다. 페이스북으로 간간히 소식을 듣고 있는 게 전부이지만, 우리는 언젠가, 어디선가, 어떻게든 만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