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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1 - 프랑스

    • 이름 : 정지혁
    • 코드 : CONC006
    • 기간 : 07/08 ~ 07/29
    • 주제 : RENO
    • 개최지역 : La Terrasse

    두 번째 워크캠프를 꿈꾸게 해준
    잊지 못할 추억

    첫 째 주. 세계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과
    일을 시작하다.

    처음 가 보는 프랑스에 처음 들어보는 조그마한 프랑스 남부의 마을, 라테라스. 그 곳에서 시작한 내 첫 번째 워크캠프의 일은 무너진 돌담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던 나는 파리에서 몇 일 간 머무른 다음 프랑스 남부의 그레노블로 기차 이동, 그 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라 테라스로 들어갔다. 라 테라스 시청앞에서 만난 팀원들과 인사를 하고 정신 없이 첫 날을 보낸 다음 내가 생활할 텐트에 짐을 풀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나를 부르는 리더의 목소리에 잠을 깨고 나가 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아침 식사를 마치고 회의를 위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녀석들! 나도 아침 먹을 수 있다고!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지 않는 3주 간의 워크캠프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저번의 폭우로 인해 무너진 자연 돌담을 마을 사람들을 위해 복구하는 작업이었다. 먼저 무너진 바위와 돌들을 완전히 들어낸 다음 바닥을 잘 다진 후 다시 바위를 옮겨 쉽게 무너지지 않을 돌담을 쌓는 일이었다. 문제는 일터가 산 중턱에 위치해서 자전거를 타고 30분 동안 산을 오르고 올라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과 돌담에 쓰이는 바위들이 건장한 남자 혼자 들기에도 버거운 무게의 것들이라는 것이었다.

    둘 째 주. 위기에 빠지다.
    휴일 때 마다 비가 내리며 계획했던 활동들을 모두 취소하고 동네 분들의 도움을 받아 동네의 강당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황금 같은 휴일 때 비가 내려 제대로 쉴 수 없는 것도 저를 비롯한 팀원들의 사기를 떨어트렸지만, 그보다 문제인 것은 우리의 텐트 생활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세 번째로 맞는 휴일. 본부 캠프와 부엌으로 쓰던 대형텐트가 무너졌다. 연일 계속 되는 비를 피하기 위해 동네 분들이 제공해 준 마을 강당에 모여있는 사이비가 계속 내려 텐트의 기둥들을 망가트린 것이다.
    텐트가 무너지며 팀원들 간의 신뢰와 각자의 인내심도 같이 무너져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텐트 생활에 대한 불편함,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힘든 일과 리더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 비로 인해 우리가 그 동안 쌓았던 돌담이 무너질 거란 걱정보다 우리 팀원들 간의 신뢰가 먼저 무너질 거란 걱정이 더 커지고 있었다. 그 동안 수면 밑에 있었던 갈등들이 차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굳은 일을 남에게 미루는 경향이 있던 젬마와 업무 리더인 조세프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고 곧 이어 첫 번째 주에는 사이가 좋았지만 서로 성격이 안 맞았던 지 통구츠와 스벳라나가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벳라나 앞에서 담배를 피던 통구츠에게 스벳라나가 화내기 시작하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스벳나라의 눈물로 싸움이 마무리되었다.
    그 눈물 덕분이었을까. 팀원들은 어느 샌가 다른 팀원들에 대한 미움보다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를 추스리고 있는 동안 프랑스 워크캠프 기구인 콩코르디아의 지원 덕분에 저번보다 더 튼튼한 텐트가 갖춰지고, 우리의 돌담도 어느새 우리의 키를 넘어서고 있었다. 즐겁기만 할 것 같았던 워크캠프 기간 동안 가장 힘든 한 주였지만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은 국제적으로도 통하는 말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우리 팀에겐 가장 중요했던 한 주였다.

    셋 째 주. 웃고 아쉬워하고 슬퍼하다.
    일을 끝마치는 마지막 날의 4일 전, 적극적인 팀원들 덕분에 이미 우리의 돌담은 거의 완성 직전이었다. 하지만 프로 정신이 투철한 우리의 리더, 그 옆의 무너지진 않았지만 불안해 보이는 돌담을 해체하고 다시 쌓자는 전격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이미 리더와 돌담 쌓기에 익숙한 저와 팀원들은 겉으론 장난으로 "Oh my god!"을 외쳤지만 아무렇지 않게 두 번째 일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이틀, 우리의 돌담은 완성되었다!
    "No more stone in my life"를 외치며 다 같이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다음 날 시장님과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우리가 완성한 돌담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다 함께 여러 나라의 요리를 만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각 나라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준비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마지막 날을 보냈다. 특히 각 나라의 노래들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부르는 시간은 정말 놀랍고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히 허물없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장님의 댄스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날, 먼저 가야 하는 팀원들과 작별하고 우리가 3주 동안 지냈던 텐트를 정리하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 남아서 돌담을 쌓아야만 할 것 같은 느낌. 겨우 3주였지만 2달은 머문 느낌. 힘들고 즐거웠다는 역설적인 말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캠프였다.

    부지런한 생활 리더 마리용 덕분이었을까. 우리 팀은 일도 많이 했지만 일이 워크캠프의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일이 끝난 후부터가 진짜라고 할까? 프랑스인인 마리용은 라 떼라스 지방 출신이 아니었지만 팀원들을 위해 주변 지역에서 방문할 만한 명소나 프로그램들을 많이 조사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일도 엄청 힘들었는데 어떻게 매일 놀러 다녔는지 믿기지 않지만, 젊음으로 똘똘 뭉친 세계의 청년들이 모였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싶다. 농장방문, 로잉, 라 떼라스 천사들과의 만남, 1박 2일 알프스 등정, 캠핑장에서의 휴식 등 수 많은 활동들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이 수 많은 활동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상하게도 점심을 먹은 후 따뜻한 햇살을 쬐며 나른하게 앉아 친구들과 보내던 일상이었다. 각자 언어를 알려주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같이 운동도 하고.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짧은 영어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지. 각자 나라의 정치, 경제 등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도 하고 결혼에 대한 짧은 토의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워크캠프 그 이후...
    워크캠프의 마지막 날. 서로 웃고 우는 모습으로 마지막을 고했던 우리들. 그 후로는 어떻게 됐을까?
    우선 우리의 워크캠프가 라 떼라스 지방의 신문에 실렸다. 고맙게도 시청에 계신 분들이 이 기사들을 스캔해서 보내주셨다. 물론 프랑스어는 배워본 적도 없기에 내용은 전혀 모르지만...

    그리고 알프스 소녀같이 생겼던 프랑스 소녀 까미에는 터키 싸나이들 통구츠와 알탄을 방문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둘 덕분에 깨알같이 터키 관광을 하고 왔다고 하더라.
    마지막으로 나는 스페인 친구 쳄마의 초대를 받아 쳄마가 사는 도시인 사라고사 축제 기간 동안 쳄마의 집에서 지내면서 광란의 스페인 축제의 현장에서 지내다 왔다. 축제 뿐만이 아니라 동네 이 곳 저 곳을 제 전용 가이드 쳄마의 소개로 돌아다니며 '이래서 친구가 좋은 거구나'를 몸으로 체험하고 왔달까? ㅎㅎ

    이 후에도 크리스마스, 새해 또는 각자의 생일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인사를 남기는 친구들을 보면서 정말 현대 기술에게 감사하며 그리고 우리들의 워크캠프에 감사하며 요즘도 종종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워크캠프 기억을 행복하게 되씹으며 드는 유일한 한 가지 소망은 내년 이 맘 때쯤 나의 두 번째 워크캠프 이야기를 이 곳에 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럽2 - 아이슬란드

    • 이름 : 조화경
    • 코드 : SEEDS99
    • 기간 : 11/23 ~ 12/6
    • 주제 : SOCI/CULT
    • 개최지역 : Reykjavik

    내 인생 최대의 혹한기 그리고 최고의 감동

    나의 워크캠프는 내 인생 최대의 혹한기였다. 추워서 고생했고 추워서 배고팠고 추워서 감동이었다. 봉사자들간의 온기와 믿음이 없었다면 그저 빙하체험이 되었을 워크캠프. 그러나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우리는 아이슬란드의 그 어떤 얼음덩이보다 단단히 뭉쳤다.
    인포싯 내용에 따라, 워크캠프 하루 전에 미팅포인트인 SEEDS HOUSE에 도착했다. 5시 정도에 도착했는데도 한밤 중처럼 아이슬란드는 매우 어두웠다. 거실에는 전 워크캠프 참여자 중에 관광을 위해 며칠 더 남아있는 사람들과 나처럼 미리 도착한 우리 워크캠프 참여자들이 섞여 나름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노력 중이었다. 얘기를 같이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국적에 놀랐고 워크캠프에 참가하는 동기가 거의 비슷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이번 워크캠프가 10번째라는 벨기에 아저씨는 대학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 30살의 나이에도 워크캠프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그 외 학생 신분이었던 모든 참가자들은 휴학 중이거나 취업 전 마지막 자아성찰의 의미로 많이들 왔다고 한다. 나 또한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 귀국하기 전에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서 이번 국제워크캠프에 참가하였다. 그 낯설던 눈 마주침이 이제 적응되면서 다음 날 워크캠프의 원활한 시작을 위해 다같이 맥주 집에 가서 한잔씩 마셨다.

    아침 해가 밝아오고 기다리면 봉사자들과 팀 리더들이 도착했다. 개인 사정으로 리더 한 명과 참가자 한 명은 워크캠프 중간에 끼기로 하였다. 나름 하루 일찍 만났다고 어제 도착한 봉사자들은 늦게 도착한 봉사자들을 반기는 여유까지 보였다. 다들 한 고생하겠다는 의지의 자세로 모였는데 저녁식사 동안 리더들이 봉사활동에 관한 질문에 소극적으로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약간 걱정이 되는 채로 내일의 프리젠테이션을 기대하면서 잠이 들었다.
    워크캠프 3일째, 아침밥을 간단히 먹고 아직은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거실에 모였다. 어제의 느낌이 적중했다. 예정되었던 봉사활동의 기간이 짧아져서 워크캠프 기간 동안 우리가 봉사활동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년과는 다른 일정에 리더들도 많이 당황스러워 보였다. 다행히 봉사자들은 이 변화에 적응할 적극성을 보였고 일단 텅 비어버린 일정을 채우기 위해 오늘은 우선 봉사자들간의 친목을 위해 아이슬란드 문화 투어를 시작했다. 리더들이 가이드가 되어서 아이슬란드 가수의 콘서트도 보고 길거리를 배회하고 리더들과 함께 첫 번째 술자리도 가졌다. 시작은 불안했지만 캠프참가자들과 캠프 리더들이 만들어가는 워크캠프가 될 거라는 기대로 부풀어있었다.

    어색함도 없어진 4일째, 다같이 친해져야 워크캠프를 잘 짤 수 있다는 생각에 워크캠프 excursion 을 오늘 다같이 떠나기로 했다. 아직은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지 못해서 의견을 나누는 데 있어 소극적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의 대자연 앞에서 모두 어린 아이가 되어 눈싸움도 하고 서로 사진도 찍고 좁은 차에 같이 앉아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많이 친해졌다. 서로 성장배경을 털어놓고 지금의 고민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우리 캠프에서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 금새 친해졌다. 이번 워크캠프의 특성상 가무에 조예가 깊은 참가자들이 많았다. 집에 도착해서 아늑한 방에 모여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기타를 연주했다. 9명의 참가자 중에 3명이나 기타를 연주할 줄 알았다. 귀여운 연주에서 프로급 연주까지 다양한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우리는 처음의 마음의 벽은 온 데 간 데 없이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봉사활동이 시작되면 더 끈끈한 가족으로 될 수 있을 지 기대를 해본다.

    5일째, 그 동안의 회의를 마무리하면서 대충 봉사활동 내용이 정해졌다. 재활용품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안해서 이웃 주민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목표가 정해지자 유치원에서 배운 종이접기부터 구글에서 검색한 현대적인 재활용품 활용 물건들까지 실용적인 재활용품 선물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것저것 구체적으로 선물 목록을 정하는 중에도 우리의 친목도모에 대한 열의를 식히지 않았다. 여느 워크캠프에나 있을 일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해서 더 뜻 깊은, 언어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각자의 언어를 가르치고 각 나라의 전통음악에서 근래 유행하는 음악까지 스피커로 틀기도 하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법한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한 공간에 모여 가까이 듣게 되니 그 즐거움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기다리던 international dinner Day!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잠깐의 외출에도 모두 배고파했다. 편식하는 사람도 없고 채식주의자인 친구들도 없어서 음식을 차리는 데에는 각자 나라 요리사들이 별 걱정이 없었다. 한국 음식팀에는 한국인이 3명이나 되어서 일손이 모자라기는커녕 좁은 식당에서 다른 요리사들에게 민폐를 끼칠 뻔하였다. 외국인이 좋아한다는 불고기와 하얀 쌀밥, 그리고 우리 셋의 만족을 위해 호박전까지 했다. 스페인의 크로케타, 프랑스의 초콜릿 케잌 후식, 영국의 쌀푸딩, 벨기에의 참치랑 복숭아로 만든 후식, 프랑스의 라따뚜이, 러시아의 생선샐러드, 스웨덴의 과자, 일본의 가쯔동까지. 세게 요리 마당에 온 느낌이었다. 와서 고생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풍족한 문화 교류를 할 줄 몰랐다.

    다사다난했던 준비기간을 마무리하고 청소년센터에서의 재활용품으로 크리스마스 선물 만들기 봉사활동과 적십자사와 함께한 봉사활동이 끝이 났다. 옷을 맞춰 입고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홍보하고 귀여운 학을 접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우리끼리 준비한 봉사활동이라 예상보다 지역주민들의 반응이 미지근했지만 그래도 준비한 노력이 속상하지 않게 열심히 하였다. 적십자사를 도왔던 봉사활동은 사회에서 소외된 가족들을 도와주기 위한 모금행사에 봉사자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여러 개의 부스를 설치하고 핫초콜릿 만드는 팀과 부스에서 핫초콜릿을 나눠주면서 모금을 권하는 팀으로 나눠 추위와 싸워가면서도 탈 없이 잘 마무리했다. 일평생 그렇게 많은 초콜릿과 우유를 녹여 핫초콜릿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거리 크리스마스로 흥분한 사람들에게 식지 않는 핫초콜릿을 나눠줬다. 한국과는 다르게 외국은 크리스마스를 큰 행사로 여기는 것 같아 봉사하는 내내 힘들지 않고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로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SEEDS 99 참가자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워크캠프 기간 동안 너무나도 많이 쌓인 정에 떠날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각자 나라에서 현실과 싸워가며 살아가고 있겠지만 워크캠프만 생각하면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방금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한 친구처럼 즐겁고 편하다. 언제까지나 보고 싶을 내 워크캠프 친구들. 한 공간에 똑같은 멤버들이 마주하기 힘들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그 때의 혹한기를 그 때의 끈끈함을 그리워한다.

    아시아 - 몽골

    • 이름 : 최진영
    • 코드 : MCE/16
    • 기간 : 08/05 ~ 08/18
    • 주제 : AGRI/KIDS
    • 개최지역 : BUHUG

    사람, 따뜻함 그리고 내가 살아갈 방향을 남겨준 워크캠프

    4개월 전부터 준비했던 한 달간의 몽골 여행 중 2주 동안 워크캠프에 참여하기로 한 나는 단지, BUHUG River 근처에 있으며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45km 떨어져있다는 캠프를 상상하며 틈만 나면 '이렇게 생겼을거야~ 저렇게 생겼을 꺼야' 라는 상상을 하고 지냈다.

    드디어 그 상상만하던 캠프에 가는 날! 워크캠프에 참여하기 2일전에 몽골에 도착한 나는 아직 어리둥절한 상태였고, 내가 몽골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워크캠프에 관한 정보라고는 몽골로 떠나기 몇 일 전, 캠프 운영자 바타르가 보낸 메일 내용 Meeting Point>> 2010년 8월 5일 am 9:00 Bayangol Hotel 앞 (울란바토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텔 앞에는 칭기스칸 작은 조각상 있음) 이라는 이 간단한 정보가 다였다. Bayangol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전날 게스트하우스에서 사귄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노는 바람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한다고 했지만, 다 준비하고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 10분 전이었다. 첫날부터 이게 뭔가 싶어서 허겁지겁 뛰고 난리를 쳤지만, Bayangol 호텔은 보이지도 않고 택시는 어떤 것이 택시인지 구분도 안가고 길 가는 몽골인에게 길 물어 보는 것은 더 어렵고 지도를 보고 맞게 온 것 같은데 이상한 길이 나오고 정말 그 좁은 곳에서 40분 동안 헤맸다. 결국 Bayangol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9시 30분. 당연히 안 기다리고 출발 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싶어 막막한 그 때 약간 작은 키에 앞머리를 내려 귀여워 보이는 몽골 소녀가 다가와 워크캠프 참여하러 왔냐고 물었다. 아직 안가고 날 기다려줬구나 라는 생각에 "YES!!!" 라고 외쳤다. 하지만 기쁜 것도 잠시, 캠프에 데려다 줄 버스가 보이고 캠퍼들이 모두 모여 30분 동안 나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저 버스에 어떻게 올라가야 하나 민망해서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죄인마냥 "I'm sor..r...y........" 한마디 내던지고 황급히 빈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우리 사랑스런 캠퍼들은 입을 모아 너그럽게 "It's Okay" 를 외쳤지만 미안해서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 출발. 몽골에 도착한지 3일밖에 되지 않았고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본 적이 없어 창 밖으로 보이는 생전 처음 보는 초원에 넋을 잃어 좀 아까 늦어서 민망했던 것도 다 잊었다. 약 1시간~1시간30분 정도 비포장 도로를 덜컹덜컹 달리고 달려 도착한 캠프는 보자마자 "우와!!!!!!!!!"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캠프는 100일 동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평화롭고 조용하고 아늑해서 정말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다같이 부엌에 모여서 간단히 어색하게 소개를 한 후 숙소를 정했다. 나는 '몽골에 왔으니까 당연히 게르에서 자야지' 라는 마음에 덜컥 게르를 선택했지만, 첫날밤부터 이 선택에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몽골의 밤은 생각했던 것보다 1000만배 정도 추웠다. 한숨도 잘 수 없을 만큼 추웠고 몇 일을 견디고 견디며 지내보려 했지만 크게 한번 아프고 난 후 결국 난 그렇게 따뜻한지 미처 몰랐던 부엌으로 이사를 갔다. 첫째 날 오후에는 몽골팀이 시범으로 해준 생긴 것만 맛있게 생긴 오묘한 맛의 점심을 먹고 캠프 주변을 산책 갔다 오니 만난 지 몇 시간도 안된 캠프 리더 짐바는 외쳤다. 공포의 "WORK TIME~~!" 다같이 모여서 감자, 당근, 양배추, 오이 등등 종류도 다양한 우리의 일터- 밭으로 갔다. 그 중에서 우리는 주로 감자밭에서 잡초를 뽑는 일을 했고, 나중에는 감자가 너무 지겨워 자기가 감자킹(KING)이라는 둥의 유치한 모든 유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가 '감자'였다. 가시가 있는 잡초 때문에 목장갑을 껴도 가끔 따끔따끔했고 잡초로 착각하고 모르고 감자를 힘껏 뽑으면 애기 감자들이 튀어나와서 당황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그럴 때는 조용히 눈치를 보며 애기 감자를 다시 땅에 묻어줬다. 캠프 기간 동안 그렇게 묻어준 감자만 몇 개인지 셀 수 없다.

    며칠을 제외한 거의 매일 오후에는 캠퍼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특별 활동 식의 다른 활동들이 있었다. 첫째 날에는 처음인 만큼 부엌에서 한밤의 몽골어 수업이 진행되었다. 아는 몽골어라고는 안녕하세요 '사인베노', 감사합니다 '바이륵샤' 뿐 이였던 나에게 처음 접하는 몽골어는 그저 '쉭쉭힉힉크흑' 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배고파, 좋은 아침, 잘자, 이름이 뭡니까?, 내 이름은 XXX 입니다, 나는 감자를 좋아합니다, 사랑해 등 아주 기본적인 몽골어를 몽골인 짐바와 오르나에게 배웠지만, 몽골어 특유의 발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웠고, 아무리 해도 안되는 발음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둘째날 오후에는 해가 지자 그 한적한 초원에 음악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환영 파티를 했다. 한국에서 춤을 춰본 기억이라고는 친구들 손에 이끌려 경험이라는 핑계로 한번 가본 클럽이 고작 다였던 내가 몽골 MCE 캠프 즉석 클럽에서는 끝까지 정말 열심히 놀았다. 춤을 추다 모두 일렬로 기차 놀이 하듯 줄지어 방방 뛰어 다니고 소리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몽골어 수업, 환영 파티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팔찌 만드는 시간, 서로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는 저녁 파티도 있어 2주일이라는 시간은 아이들과 친해지고 정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캠프 생활 오전에는 누구라고도 할 것 없이 먼저 일어난 사람이 물 받아와서 물 끓이고 커피, 홍차, 프림, 설탕, 빵, 초코잼, 버터를 꺼내놓고 컵, 숟가락 20개 정도를 세팅해 놓는 것으로 아침은 시작되었다. 모두 부시시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GOOD MORNING~" 아침인사를 하며 하나 둘씩 부엌으로 모이는 아침시간이 저녁시간보다 난 더 기억에 남는다. 아침 8시~8시 50분 정도까지 아침을 먹은 후 씻고, 먹고 모든 것을 한군데에서 해결해야 하는 차디찬 지하수 물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면 다시 WORK TIME. 감자밭에 가서 아이들과 팀을 이뤄서 잡초를 뽑고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WORK TIME까지 거의 3~4시간의 쉬는 시간이 있었다. 처음에는 쉬는 시간에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추워서 밤에 못 잔 잠도 보충 했지만 캠프 생활이 익숙해지고 캠퍼, 아이들이랑 친해진 후에는 같이 노는 시간이 턱 없이 부족해서 시간만 나면 노느랴 바빴다.

    아이들 중에서도 날 유난히 잘 따르던 17살 남자아이는 내가 쉬는 시간일 때마다 찾아와서 항상 같이 있고 같이 놀았는데, 항상 그런 웃고 장난치는 얼굴만 보다 그 아이가 고아원에 오게 된 사연을 캠프 리더에게 듣고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 아이와 피가 섞인 가족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어디에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정말 지독히 외로운 아이였다. 시장에서 울고 있는 것이 발견 되어 4살 가량에 그곳에 오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고아원이지만 보통 부모님 중 한 분은 계셔서 주기적으로 만나거나, 친척이 있거나 또는 형제, 자매끼리 고아원에서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아이에게는 이 세상에 피가 섞인 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걸 듣고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참 많은 생각이 오갔던 것 같다. 가끔 별거 아닌 작은 일에 불평 불만을 하고 만족하지 못했던 내 삶이 그 아이 앞에서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닳아서 헤진 옷을 입고 오랫동안 해온 밭일로 나무판자처럼 거칠 때로 거칠어진 손 그리고 들려진 손톱, 온통 상처투성인 손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뭉클 해질 정도로 안쓰러워 보였다.

    부모님의 보살핌은커녕, 부모에게 일찍이 버림받은 아이들이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항상 웃고 정을 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살아가면서 항상 남과 함께 하는 삶, 그리고 버림 받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캠퍼 중 네덜란드에서 온 Henk를 처음 봤을 때에는 그저 나이가 조금 많을 뿐 우리와 같은 캠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4년째 단지 이 MCE 워크 캠프 때문에 여름마다 몇 십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6시간의 시차가 있는 몽골을 찾아온다고 했다. 50대 유럽인 Henk를 보고 있으면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고 또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는 없어도 매년 몇 십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자신들을 찾아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마 아이들은 든든한 아빠를 얻은 듯한 기분일 것 같다. Henk를 2주 동안 봐오면서 나도 당장 지금부터 Henk처럼 작은 것이라도 조금씩 조금씩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야겠다는 은근한 다짐을 했다. 마지막 날 아이들과 헤어지려니 기분이 우울했다. 하지만 내년에 이곳에 아이들을 다시 보러 오겠다는 생각이 캠프 기간 동안 생겼고, 내년에는 이 꼬맹이들이 어떻게 변해있을까 궁금해졌다. 무척 아쉬웠지만 "See you next year!" 이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헤어졌다.

    2주 동안의 워크캠프는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추억, 사람, 따뜻함 그리고 내가 살아갈 방향….


    아프리카 - 탄자니아

    • 이름 : 허지영
    • 코드 : UV 252-D
    • 기간 : 01/23 ~ 02/05
    • 주제 : RENO/ KIDS
    • 개최지역 : Lole-KILIMANJARO

    행복한 가르침을 얻게 해준 좋은 스승.
    탄자니아 워크캠프

    이번 워크캠프 활동에 참가하고자 마음 먹은 것은 사실 개인적으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졸업을 목전에 두고 아직까지도 구체적인 진로를 생각하지 못 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였던 나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가족들에게도 조금은 뜻밖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남들보다 조금 더디게 나아가는 것이라면 꼭 하고 싶었던, 어쩌면 해야만 하는 일이었던 이번 캠프를 이 때 참가하는 것이 가장 적기라고 굳게 믿고 준비를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결정이어서 그런지 이번 워크캠프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나 스스로에게 굉장히 컸고, 워크캠프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 이 결정에 대한 후회는 절대적으로 전무하며, 기대 이상의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마음과 배움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프리카라는 곳은 늘 마음 한 켠에 '언젠가는 이 땅의 흙 내음을 꼭 맡아봐야지'라는 생각과 함께 자리 잡고 있던 이름이었다. 그 언젠가가 생각보다는 빨리 찾아왔던 것 같다. 특히 탄자니아라는 국가는 왠지 모르게 나에게 있어서 항상 가보고 싶던 나라였고 자연스럽게, 아무 고민 없이 선택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일 때문에 아프리카에 2년 동안 계셨던 탓에 아프리카에 대해 듣고 보게 되는 것이 있었고 덕분에 아프리카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조금 접어 두었다. 이것은 아프리카 탄자니아 Dar es salam에 도착하면서부터 나에게 실망감보다는 기대감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Dar es salam에 도착한 많은 여행자들이 아프리카의 어두운 면모에 놀란다고들 한다. 그리고 생각했던 순수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에서도 실망하고는 한다. 그만큼 조금은 위험하기도 하고 즐비한 고층 건물들로 여느 도시와 다름 없는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는 어느 나라나 어쩔 수 없이 도시만이 가지는 문화가 있고, 이런 아프리카의 발전에 대해 함부로 실망해서는 안된 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오만과 편견'보다는 '다름과 이해'라는 모토를 머리와 마음으로 새기고 있었고, 있는 그대로의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모토를 기대 이상으로 충족시키는 시간이 찾아왔다. 내가 참가한 워크캠프가 진행된 마을은 마음 한 켠에 있던 '아프리카의 흙 내음'을 정말 온전하게 맡을 수 있었던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킬리만자로 산간 중턱에 있는 마을로 대부분의 집이 바나나 숲 한 가운데 있을 정도로 아담하고 귀여운 마을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난데 없는 외국인의 방문에 조금 신기해 하는 듯 하다가 하루도 안 되어 우리들에게 'Jambo!'라는 인사를 전하며 미소를 보내줄 정도로 친절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지나가며 인사 한 마디를 건네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어떤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는 정 많고 따뜻한 마을이었다. 매력적이고 따뜻한 이 마을에서 만난 워크캠프 친구들 또한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적은 인원의 그룹이었지만 그만큼 더욱 서로에 대해서 알아 가고 친해지는 것이 쉬웠다. 2주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내가 함께한 친구들과는 또 다른 가족을 만들기에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성격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 있던 상황도 물론 있었지만 모두 이해하는 마음을 앞세워 부드럽게 해결해 나가기도 했고 그러한 상황을 오히려 더욱 끈끈한 우정을 다지는 계기로 만들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연락하면서 추억을 공유하고, 서로 가족이라고 부르며 지내고 있는데 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번 캠프에서 내가 하게 된 자원활동은 지역교회에 부속되어 있는 유치원에서 3~4살 정도 된 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말이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지 아직 모국어인 스와힐리어도 쓰고 말하기를 배우는 단계의 어린 아이들이라 굉장히 기본적인 영어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다. 오히려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지금 진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마음과 순수한 미소와 갖가지 아름다운 표정으로 경직된 내 마음이 함께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늘 무언가 채우려고만, 채워야만 할 것 같았던 마음이 아이들이 보여 준 모습으로 '이미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행복한 아이들이었다.

    물론 아프리카는 가난하다. 자기 발보다 작은 신발을 신느라 끙끙대고 우리나라에서는 헌 옷에 가까운 옷을 입고 와서는 새 옷이라며 자랑을 하고 연필 선물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이 대다수이다. 분명히 아프리카에는 슬픈 모습들이 많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의 눈빛만큼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들의 미소만큼 아름다운 미소도 없을 것 같고 이들의 마음만큼 충만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이들만큼 행복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없을 것 같다. 이번 워크캠프는 나에게 '아프리카'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해주었던 것 같다.

    중남미 - 멕시코

    • 이름 : 김희섭
    • 코드 : VIVE25
    • 기간 : 02/01 ~ 02/17
    • 주제 : ENVI
    • 개최지역 : Colola

    자연과 그 속의 작은 생명이 전해 준 감동의 워크캠프

    봉사활동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도, 동물을 남달리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물론 바다 거북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세계 일주 여행 중 다음 정류국이 멕시코였고, 멕시코에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 결정한 워크캠프였다. 그리고 타는 듯이 더운 해안 마을에서 보낸 한겨울, 나는 또루뚜가와의 헤어날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멕시코시티에서 한나절을 이동하여 도착한 작은 해안 마을 Colola에 도착한 우리 캠프 멤버들이 가장 먼저 뱉은 말은 "지상낙원이 여기 있었구나."였다. 해변의 해먹에 걸쳐 누워 끝없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철석철석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 고단한 버스 이동은 물론이거니와 그간 고단했던 여행의, 생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
    캠프 멤버는 독일 친구 둘, 일본 친구 둘, 타이완 친구 셋, 나를 포함 한국인 셋, 총 열명이었다. 아시아 국가를 제외하곤 방학기간이 아니라 그런지 다양한 국가에서 참가하지 못한 것과 20명으로 계획된 캠프 규모에 비해 다소 적은 인원이 아쉬웠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문화가 잘 맞는 멤버들과의 생활이라 트러블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많지 않은 멤버들이라 오손도손 지내며 매우 가까워 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거북이 보호 봉사활동은 거북이들이 활동하는 새벽 10시부터 2시 정도, 하루 4시간 정도 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은 멤버들과 소일거리를 작당하며 보냈다. 캠프로부터 걸어서 30분, 히치하이킹으로는 2~3분이면 도착하는 마을에 가서 실없이 배회하거나 식사 재료를 사고, 마을에 있는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주말에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놀기도 하고, 봉사활동을 하며 사귄 현지 친구의 코코넛 농장과 파파야 농장에 놀러 가기도 했다. 지역 주민들과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기 때문에, 틈틈이 스페인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잘 기억해 뒀다가, 로컬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때 공부한 말을 써먹는 것도 봉사활동의 쏠쏠한 재미였다. 또 한번은 코코넛 껍질로 목걸이를 만들고 코코넛 잎으로 모자를 만드는 등, 쉴새 없이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해먹에 누워 바닷바람 맞으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낮잠을 잤다. 참나, 그래도 시간은 남았다. 우리는 새 치약의 빵빵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무더운 겨울의 흘러 넘치는 시간을 향유했다.

    우리의 주임무인 바다 거북이 보존 활동은 거북이의 알을 수거하고, 알을 묻고, 부화한 새끼 거북이들을 바다에 풀어주는 일이다. 늦은 밤 해변으로 올라 온 산란기의 어미 거북은 뒷발로 땅을 파서 80~120개의 알을 묻는다. 우리는 70cm 정도 깊이의 땅을 손으로 파고 알을 수거한다. 거북이 알을 식용으로 사용하려는 무리들로부터, 또 야생 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알을 보호하여 생존율을 높이기 위함이다. 이때, 알을 낳기 위해 해변으로 올라 온 거북이의 종류와 몸의 길이와 산란하는 시간대, 날씨 상태 등을 기록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다. 통계를 통해 거북이 보호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수거한 알은 캠프 내에 있는 부화장에 묻는다.

    자연상태와 비슷한 깊이인 70cm 정도의 깊이로 묻는데, 묻은 지 50일 정도가 지나면 그 깊이를 뚫고 새끼 거북이가 올라온다. 새끼 손톱만한 새끼 거북이의 머리통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가장 신비로웠던 장면이다. 땅에서 올라 온 새끼 거북이들은 커다란 바구니에 모아 바다로 보내 준다. 파도로부터 10m 정도 떨어진 곳에 놓아주면 새끼 거북이들은 본능적으로 파도에 맞서 바다로 향한다. 본능이 조금 약한 녀석들도 있기 마련인데, 그런 녀석들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다. 그렇게 바다를 향해 힘차게 걸어간 또르뚜가 100마리 중 1마리가 생존하여 수십 년이 흐른 후 알을 낳기 위해 다시 해변으로 온다고 한다.

    18일간의 봉사활동. 단 일분일초도 힘들거나 귀찮은 시간이 없었다. 같은 마음을 가졌기에 국적과 언어가, 성별과 연령이 달라도 십년지기처럼 편안했던 캠프 멤버들과의 농담 따먹기, 열악한 재료를 사다가 이상한 요리 해먹기, 해변에 누워 쏟아지는 별똥별 바라보기, 음악과 함께하는 캠프파이어, 데낄라 파티…… 정말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역시 18일 동안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사실, 멤버들과 웃고 떠들며 보낸 즐거웠던 시간에 밀려 거북이 알을 줍고 묻고 하는 하루 4시간의 작업은 귀찮은 노동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 돌이켜 보니, 자연과 그 속의 작은 생명이 전해 준 감동은 하루 4시간의 노동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나온 지 30분이 채 안 된 새끼 또르뚜가들이 아장아장 걸어 그 끝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태평양 망망대해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니, 다시금 두 눈이 매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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